현각 스님 발언, 개인돌출 아냐
출재가 이분법 구조 벗어나
새로운 시대 양태 감지해야

조계종 중심 문제의식
상황파악 못하는
한국불교 심각성 보여줘

▲ 이민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현각 스님은 한국불교계의 스타이다. 아마 한국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종정 스님이거나 행정 수반인 총무원장 스님의 법명은 몰라도 현각 스님하면 한국의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귀에 익었으리라. 불교계를 넘어 종교계의 인기 스타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런 그가 이제 조계종단을 떠나겠다고 했다. 나중에는 활동 공간을 유럽으로 옮기겠다는 의도였다고 정정을 했지만 조계종단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계속 유지했다. 조계종단의 모순과 비리,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외국 불교수행자들이 겪는 힘든 여건을 더 이상 감내하기 힘들다고 했다. 세속으로의 퇴속이 아니라 또 다른 불교공동체로 옮겨가 승려생활은 계속한다고 말했다. 파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 문제를 돌아보자. 먼저 거대종단인 조계종단의 파행적 운영과, 행정 승려들의 일탈된 행위, 재가신자를 도외시한 관료적 운영방식이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현각 스님이 지적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어 거대종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주로 재가 모임의 여러 단체에서 외국승려들까지 그렇게 지적하지 않는가하고 공감의 메시지를 보낸다. 특히 일반 신도란 시주의 리소스로 생각되어 불교신행=복 빌기=시주금으로 치환되는 단순구조로 이루어진 것이 지적된다. 복잡하게 변형되는 현대적인 삶을 이끌 불교적 신행과 방안이 모색되는 것이 아니라, 세 불리기와 힘의 집중과 자기 과시하는 일이 조계종단 신행의 모든 것으로 비치게 했다는 비판이다.

사실 이런 파행적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상당수의 신행자가 입을 닫고 등을 돌리고 있다. 이것이 조계종단의 현장이다. 여기에 현각 스님의 발설이 돌출된 것이다. 그 파장을 의식해서인지 교육, 문화부분을 담당했던 조계종단의 한 스님은 즉각 반론을 제기 하며 현각 스님에 대해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판을 했다. 이제껏 여느 승려와는 다른 대접을 받은 외국 승려로서 그가 한 비판은 소위 외국우월주의의 산물같이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각 스님의 발언이 일으킨 파장은 거의 막판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나는 현각 스님을 포함하여 외국인 불자를 오랜 기간 관찰하며 몇 편의 글까지 썼다. 이 분들의 위상을 현대적인 삶의 형태와 연관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현각 스님의 종단 비판과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불교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관점이다. 현각 스님의 지적 중의 하나인 한국불교의 민족중심, 내 것 중심적 사고방식이 다시 이 논란의 핵으로 떠오른 것이다. 어느 곳, 어느 시대이건 승단의 현장 행태는 항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상적인 교단이란 존재해 본적이 없다. 조계종단만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이유도 없다. 심지어 부처님의 파승(破僧, Sanghabheda)’이란 가장 무거운 계율마저 역설적으로 승단의 파행성을 노출시킨 것이 아닌가. 왜 조계종단이 잘못과 비리를 인정하며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어째서 조계종단은 이 외국승려의 뼈아픈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거짓말쟁이거나 전혀 우리 현장을 보지 못하는 피상적 관찰자로 전락시키는가?

더욱이 외국승려를 수용하는 우리의 태도가 과연 적절했으며, 행정적인 배려는 합당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의 국제화와 세계화의 필요성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래서 종교의 국제화, 세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별로 논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원(始原)이 기독교 선교주의의 말단적 표현이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상품 수출하듯 한국불교도 팔리기를 원한다. 한국불교가 티벳 불교나 남방 위빠사나 불교처럼 서양인이 선호하는 불교이기를 원했고, 그런 즈음 현각 스님이 한국에 들어 왔다. 그러나 정작 그를 출가시킨 숭산 스님은 조계종단이 이들 외국수행자를 수용할 제도적 장치이며 수행의 기준이 없음을 알고 고민했다. 그래서 관음종이란 새 종단까지 발주시켜 이들을 받아들였으며, 지금 세계 각지에서 훌륭한 수행단체의 몫을 하고 있다. 소위 한국 스님이 시작한 세계화의 한 부분이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외국인으로 한국 불교를 겪으며 참선수행과 불교를 공부하다 본국으로 귀환하여 그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 교수가 되거나 재가불자로 환속하여 명상수행에 관한 저술과 강연, 수행단체를 이끈 경우도 있다. 로버트 버스웰(Robert Boswell)과 스티픈 베츨러(Stephen Batcheler)는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대표적 불자들이다. 버스웰 교수는 이후 한국불교학을 대변하는 학자로 근자에는 보통 불교학자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동국대 불교학술원 원장으로까지 추대되었다. 그것도 스님 위주의 이사회에서 선발되었다. 베츨러는 우리 사찰에서의 참선수행 경험은 물론 남방불교수련에 심취하여 부처님 초기의 수행을 일상생활 속에 재현시키려고 여러 형태의 이론과 경험을 실험하고 있다. 당연하게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낯설게 여기는 것은 나의 고정적인 입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어떤 낯설음도 나에게 와서 수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조계종단은 자기에게 익숙한 것만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선가의 기본적 화두 없음하나만으로도 이 낯설음을 수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어떤 고정적 틀도 주장하지 않는 터에 종단에서 꺼릴 것이 무엇이 있는가?

다음에 인용된 파란 눈의 불자가 한 발언을 보라. 현각 스님의 발언은 한 개인의 돌출적인 것이 아니다.

승직의 불교 엘리트는 재가 수행자에 대해 권위를 증대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특정 전문 집단을 공경하고 의존하며 무엇인가를 바치는 그런 문화를 지니고 있다. 곧 고승(高僧), 노사(老師), 라마승이거나 아잔(Ajahn)에게 말이다. 그러나 불법을 자신의 언어, 우리 자신의 시대적 맥락에서 활용한다면 승직에 연계된 교리적 권위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본래의 목소리를 찾을 필요를 느낀다. 나는 더 이상 전통적인 동양의 스승들 발밑에 앉을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Tricycle, 2010년 봄 호의 인터뷰 기사)

이것이 현재 서양에서 이루어지는 불교 신앙 스타일의 하나이다. 현각 스님의 발언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우리 조계종단은 이런 스타일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것인가? 우리와 비슷한 입장에서 서양에 선불교를 전파하는 일본 선승은 이렇게 실토한다.

미국 불제자는 승려가 아니지만 또 재가자인 것만도 아니다. 아마 이들에게 알맞은 적절한 방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일 것 같다. 우리(동양)가 재가출가라고 하는 이분법적 분류로 차별화하는 것과는 또 다른 양태가 감지되고 있다.”

(스즈키 슌, Zen Mind, Beginner’s Mind)

현각 스님이 일으킨 파장은 이미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신행 형태에 따른 것이다. 다만 그 와중에 조계종단의 해묵은 파행이 끼어 있을 뿐이다. 그것을 민족 중심, 내 것 중심, 조계종단 중심으로 문제를 삼는 것은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한국불교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글은 한국종교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의 종교문화 다시 읽기’<89일자>에 게재된 원고를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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