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량여국 일화에 대한 소고

현장의 임신은 구업의 결과
정상적인 ‘성태’ 아닌 ‘범태’
남녀 다름을 인정, 존중해야

전 시간에 좀 거창하게 광고를 했지요? 사리불의 물음에 대한 하늘 아가씨(天女)의 대답 속에 남녀 양성평등에 대한 ‘핵폭탄급’의 혁명적 시각이 나온다고요. 그거 한번 잘 터뜨려 봐야 할 텐데…. 한번 보시지요.
천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술로 어떤 여인을 만들어 놓고, 왜 여인의 몸을 바꾸지 않느냐고 하면 되겠느냐고요. 사리불은 당연히 그건 말이 안 된다 하지요. 그러자 천녀는 말합니다. 모든 법도 (요술과 같이) 일정한 모습이 없는 것인데 어찌 여인의 모습이라는 것에 집착하느냐구요. 그러면서 신통력으로 사리불을 여인으로 바꿔버립니다. 자신은 사리불로 바꾸고요. 그리고 말하죠. “사리불, 당신이 여인의 몸을 (남자의 몸으로) 바꾼다면 이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몸을 바꿀 것입니다.”

또 말합니다. “사리불께서 본디 여인이 아닌데 지금 여인의 몸을 나타내고 있듯이, 세상의 모든 여인들도 여인의 몸을 가졌지만 여인이 아닙니다.” 결국 모든 법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데, 인연 따라 남자로 나타나기도 여자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치 요술로 만들어진 거짓 몸과 같은데 거기에 무슨 차별과 집착을 두느냐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정말 남자라는 것과 여자라는 것에 매달리는 우리의 분별을 한방에 깨뜨려버리는 소식 아닌가요? 정말 남녀평등문제에 대해 역사를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보이는 말씀 아닌가요? 핵폭탄급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관점 - 당신은 남자로 나는 여자로 있지만 그것이 절대절인 것은 아니요 단지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 모습에 맞는 역할을 연출하는 것을 필요하겠지만, 그 실답지 않은 모습에 집착하고 차별하는 것을 벗어나는 큰 시각에 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는 잘못된 방식을 벗어나, 서로 다른 두 존재의 원만한 조화를 통해 아름다운 이상을 추구해나가는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겠지요. 그런 바탕 위에서만 건강한 성에 대한 담론도 가능해지겠지요. 지금이라도 부처님의 이곳저곳에 심어 놓으신 수많은 지혜폭탄이 터지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독교계에선 가끔 ‘성령폭발’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행사를 벌이던데…. 불교도 ‘지혜폭발’을 구호로 내걸고서 말입니다. 이크, 이러다 보니 제가 무슨 폭탄테러범 같네요. 하하.

‘남녀유별(男女有別)’, 좋은 말입니다. 남과 여가 구별이 있어야지요. 그게 혼동되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단지 구별에 그쳐야지 그것이 성 차별로 나아가 어떤 성이 다른 성을 지배하는 구조로 가면 안 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그것에 우열은 없다. 그렇기에 서로 다름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서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러한 선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남녀의 구별과 역할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서로 바꿔서 할 수 없는 것이 있지요. 바로 임신과 출산입니다.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거! 남자들은 모릅니다. 그리고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사실이 여성에게 많은 제약이 되었고, 그것이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게 된 원인이 되었지요. 신체적인 제약, 활동의 제약에 따라 여성들의 무대가 좁아지고, 대외적인 활동을 남성들이 도맡아 하게 되면서 새로운 지식은 남성에게 축적되고, 그것을 무기로 하여 다시 여성을 지배하고…. 그런 순환이 나온 겁니다. 모든 남자들이 여성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배은망덕하게!

그러한 남성들에게 “너희도 맛좀 봐라!”하는 차원에서 현장법사와 저팔계의 임신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일까요? 여성들만 있는 나라, 그 속에 들어간 이 둘에게 남성의 업보를 대표로 짊어지게 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하게끔 하려는 깊은 뜻에서 이런 설정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하하! 그건 아닌 듯합니다요. 서유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현장법사와 저팔계 임신사건의 의미를 드러내 주고 있어요.

 “구업을 씻어내니 몸이 깨끗해지고, 범태를 녹여 없애니 자연을 몸으로 하는구나(洗淨口業身乾淨, 消化凡胎體自然)”

그러니까 두 사람의 임신은 구업(口業)의 결과물이요, 성태(聖胎)가 아닌 범태(凡胎)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성태라는 것은 진정한 도를 닦아 성인의 경지로 들어가는 과정의 산물을 말하는 것이지요. 범속한 욕망도 강화되고 강화되면 어떤 결과물을 낳게 마련입니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삿된 도를 닦아도 신통을 얻을 수 있을 것과 마찬가지지요.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도둑질을 열심히 하면 도사리(盜舍利), 성적인 것을 열심히 추구하면 색사리(色舍利)가 나온다 하더군요. 흐흐…. 혹시 나칠계님도 무슨 사리 하나 나오지 않을까요?

도교적으로 말하자면 성태란 금단(金丹)을 연성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장 법사와 저팔계 뱃속에 생긴 것은 음양의 조화로운 화합에 의해 이루어진 성스러운 태, 진정한 불로장생을 이루게 하는 금단이 아니라 욕망의 결과물인 범속한 태라는 것입니다.

여성, 즉 음(陰)만 있는 나라에 양기를 주어 임신하게 하는 자모하의 물, 그것은 양기의 정수겠네요. 그런데 양에 해당하는 현장과 저팔계가 양을 취하여 임신을 했으니 정상적인 임신이 아니지요. 그러니 그 부당하게 들어와 유사임신(?)을 일으키고 있는 양기를 없애서 낙태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낙태천이 있는 지명이 해양산(解陽山), 즉 양을 풀어 없애는 산이네요. 그런데 그 낙태천 골짜기를 여의진선이란 도사가 점거하고 있는 바람에 좀 힘들었지요? 앞에 나왔던 요괴 홍해아의 삼촌인데, 홍해아를 굴복시켜 결국 관세음보살 문하로 들어가게 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지요.

우리 생각엔 홍해아가 부처님 문중으로 들어왔으니 참으로 경사스럽고도 경사스러운 일일 텐데, 그것을 원망하다니…. 참으로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보는 눈이 이리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군요. 그래도 여의진군 물리치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아서 다행이었지요. 우선 여의진군 싸움 실력이 손오공에 못 미치는데다, 사오정까지 가세하지 무슨 수가 있겠어요? 그저 극성스럽게 물 못 떠가게 방해를 해댔지만, 손오공이 싸우는 사이 사오정이 물을 떠가버리니…. 그래서 임신이라는 좀 망측한 사건 치고는 쉽게 난관을 돌파했네요.

그렇지만 여기가 어디였지요? 여인국이예요, 여인국! 여자들만 있는 동네에 남자들 일행이 이렇게 들어왔는데 그렇게 쉽게 통과가 되겠어요? “남자다!”하면서 모든 여인네들 밀고 끌고……. 그러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서유기의 표현을 잠깐 볼까요?

“아리따운 여인들 길에 가득, 씨 줄 남자 부르고 (嬌娥滿路呼人種)
거리를 메운 젊은 여인들 고운 낭군 맞이하려 하네(幼婦盈街接粉郞)

나칠계님이 정말 가고 싶어 할 만한 곳이겠지요. 그런데 정작 이곳에서는 나칠계님이 좋아하는 저팔계의 흉측한 용모가 여인들의 접근을 차단하네요. 아마 저팔계가 없었으면 길거리에서도 무사치 못했을 것 같은데…. 나칠계님도 그냥 밝히지만 말고, 여성분들에게 어필할 요소를 좀 많이 만드셔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저팔계 덕분(?)에 길거리에서는 번거로움을 덜었는데, 일이 좀 사건이 크게 벌어지네요. 통행증 도장 받으러 간 곳의 관리가 현장 법사의 내력과 비범한 풍모를 윗선에 아뢰면서 결국 여왕이 청혼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네요. 제자들은 요괴 같다 하니, 제자들만 경 구하러 가라 보내고 현장 법사는 여기 남겨 천생연분 이 내 몸과 백년해로를 하고 지고! 이런 강렬한 뜻을 전해오니 참으로 난감하네요.

그런데 이게 웬 일? 혼인을 청하는 사신이 왔는데, 손오공이 나서서 적극 혼인을 추진하네요. 현장 법사 은근히 좋아서, 이크 이게 아니고, 기겁을 하여 “이 무슨 짓거리냐!”하고 호통을 치지요. 손오공, 사신을 보내고서 계책을 내놓네요. 이름하여 “친한 척하여 그물을 벗어나고(假親脫網)”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金蟬脫殼)” 쏘옥 빠져나가는 계책이라네요. 거짓 혼인을 허락하고, 저희들 배웅한다는 핑계로 국성 밖으로 나오셔서 그대로 저희랑 달아나면 됩니다요. 그리하야…. 그 계책대로 시행이 되는데….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많아요. 현장 법사에 반한 여왕의 애틋한 정과 그저 인도로 경구하러 갈 생각만 하는 현장 법사를 묘사한 대목 한번 보고 넘어가지요.

하얀 손 맞잡고 함께 수레에 오르네.
저 여왕은 기쁘게 부부가 되려 하는데,
저 현장법사는 부처님 뵐 마음만 급하구나.
한쪽은 동방화촉 밝혀 원앙의 즐거움 바라는데, 다른 쪽은 서쪽 영취산으로 가서 세존 뵙고자 하네.

애고, 짠하네요. 이렇게 엇갈리다니. 애초에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면 결국 갈라설 수밖에 없어요. 공자님 말씀을 빌리면, “추구하는 길이 다르면 더불어 무엇을 꾀할 수 없다(道不同, 不相爲謀)”는 것이지요. 배웅 나와서 그대로 달아나려는 현장법사를 잡고 만류하는 대목에 저팔계가 한 소리 하는데, 그 말이 거칠지만 이런 뜻을 잘 담고 있군요. “우리 승려들이 당신처럼 해골에 분바른 족속과 무슨 부부가 되겠소?”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저팔계가 좀 심통이 나서 한 소리 아닐까요? 자기는 지원해도 싫다하고 현장법사만 붙잡으니 말이지요. 아무래도 좀 그런 것 같지요? 그리고 그 저팔계의 말은 좀 심하지 않은가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해골에 분바른 족속’이라니요? 그런 식으로 이성을 매도한다면, 특히 여성을 매도한다면, 남자는 뭐라고 매도를 해야 할까요? 여성이건 남성이건 예쁘게 보이려 애쓰는 것은 나쁜 짓인가요?

그리고 그렇게 거칠게 매도할 만큼 성적인 추구란 것은 죄악인 것일까요? 삼쾌선생은 조금 생각이 다르네요. 물론 스님의 입장에선 철저히 금해야 되는 것이 색욕이겠지만, 색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색욕을 떠나게 되면 어찌 되는지는 말씀 드렸죠? 인류멸종! 그렇다면 스님들은 왜 이렇게 색욕을 경계하고 멀리하는 것인지, 재가자들은 또 거기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좋을지….

다음 시간엔 이런 이야기 나눠보지요. 아직 끝나지 않은 색욕의 관문, 전갈 요괴 이야기와 곁들여서요. 다음 시간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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