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

남지심 지음|불광 펴냄|1만 7천원
[현대불교=김주일 기자] 이 책은 청도 운문사를 한국의 대표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일궈낸 명성 스님 일대기를 담은 소설이다.

비구니 승가 교육에 새 바람 일으켜
이부승 제도 복원, 비구니사에 한 획
2007년 ‘탁월한 불교 여성상’ 수상

명성 스님〈사진〉은 폐허와 다름없던 운문사에 와서 40여 년간 운문사 강원을 세계에 드러내도 손색이 없는 운문승가대학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선원, 율원을 갖춘 대가람으로 일으키기까지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 힘겹고 드라마틱한 여정을 있는 그대로 작가가 섬세한 필체로 그려냈다.

비구니 교단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비구니의 계맥과 명성 스님이 일군 운문사에 대한 찬사가 잇달은다. 명성 스님의 유발상좌로 30여 년 스님을 가까이서 바라본 〈우담바라〉의 남지심 작가가 비구니계의 큰 스승 명성 스님의 발자취를 평전소설로 꾸몄다. 스님이 생존해 계시고, 책 속에 생을 정리해 놓은 자료들이 많아서 평전 쪽에 가깝다. 이 책은 한국 비구니사를 연구하는 데 활용해도 큰 도움이 될 만하다.

〈명성〉은 스님의 수행자, 교육자, 행정가, 지도자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했다. 그러나 단순히 명성 스님의 개인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스님의 생 자체가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산증인으로서 한국 비구니 역사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운문사 학인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것이다. 먹거리 해결을 위해 농사짓던 이야기, 사교반 집단 탈출 사건, 감 서리 갔다가 사단이 난 이야기, 간담을 서늘케 한 화재 사건 등 학인들과의 재미있는 일화들은 책 장을 넘기는 내내 절로 웃음 짓게 한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명성 스님이지만 학인들을 포근히 감싸주는 어머니 같은 모습은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전해온다. 이외에도 명성 스님의 수행 이야기에는 각 사찰의 창건 설화, 관세음보살 전생 이야기, 스님들의 일화 등이 녹아 있어 읽을거리가 다양하고 흥미롭다.

1930년 경북 상주서 출생한 명성 스님은 1952년 합천 해인사 국일암서 선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3세 되던 해 부친인 관응 스님이 출가의 길을 권했다. 관응 스님은 유식학의 대가로 당대 최고의 강백이었고, 최초로 무문관서 6년간 수행을 마친 선승으로 존경받았다.

1970년 40세 때 명성 스님이 운문사 강원에 강주로 왔을 당시만 해도 강원 교육은 서당에서 훈장이 가르치는 방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명성 스님은 전형적인 주입식 교육의 틀을 깨고 모든 수업을 논강식 교육 방법으로 바꾸었다. 또한 절집 공부만으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외학(外典)과의 연계성을 강조했다.

미술, 외국어, 심리학, 철학, 유학, 다도, 꽃꽂이, 피아노, 서예 등을 교과목에 넣었다. 그 당시 경상북도 산골서 이런 교육을 한다는 것은 시대를 앞서 간 획기적인 일이었다. 절에 들어오면 여성성을 제거하고 남성을 닮은 중성이기를 강요한 시절에 명성 스님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살려 포교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승가 교육 현장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명성 스님은 비구와 비구니는 다 같은 부처님 제자로 그 위상이 대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로 비구니가 비구니로부터 전강을 받는 전통을 만들었다. 1983년 명성 스님은 평소 존경한 화산당 수옥 스님에게 법제자로 위패 건당 하면서 자신의 뿌리를 만들었다. 수옥 스님은 금룡 스님, 혜옥 스님과 함께 근대의 3대 비구니 강백 중 한 분이다. 이후 1985년 두 제자 흥륜, 일진 스님에게 전강을 함으로써 기둥을 만든 것이다. 이 전강 식은 비구니 손으로 역사의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비구니사에 기록됐다. 비구니 강사가 배출돼 비구니를 직접 가르치는 여법한 이부승 제도가 되살아났으니, 끊어졌던 강맥을 복원시킨 명성 스님의 생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비구니 위상이 높아지자 종단서도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직접 계를 주는 별소 계단을 만들었다. 2001년부터 다시 구족계 별소 계단이 만들어져, 이제 비구니스님은 비구스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 불교 교단의 한 축을 감당하게 됐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의 노고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명성 스님이 존재했다.

스님은 자로 잰 듯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엄하게 교육하는 한편, 허물을 다 덮어주는 포근한 어머니가 돼 주었다. 그래서 학인들 마음속에 명성 스님은 관세음보살처럼 자리한다.

명성 스님은 육군사관학교서 사경 법회를 주관하고, 논산훈련소 군법당서 전계사로 3,500명의 현역 군인들에게 계를 주는 수계 의식을 치렀다. 비구니스님이 전계사가 되어 수천 명의 군인들에게 계를 준 것은 명성 스님이 처음이었다. 이는 군 포교의 이정표가 되었다. 스님은 지금도 수계 법회를 지속적으로 후원한다. 명성 스님은 ‘법계장학회’와 ‘법륜비구니장학회’를 만들어 불교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명성 스님은 2007년 조계종 명사 법계에 품서돼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UN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탁월한 불교 여성상’(OWBA)을 수상하는 등 세계 불교계의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남지심 작가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존경할 수 있는 분을 만나는 일이라고. 명성 스님을 만난 남 작가는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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