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득 불교아동문학가(83ㆍ前 한국불교아동문학회 회장)

 

신현득 작가는… 1933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20여 년간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소년한국일보에서 취재부장으로 일했다. 단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를 마쳤으며, 단국대 국어국문학과 강사와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서울예대 아동문학론 강사 등을 지냈다. 새싹회 3대 이사장과 한국불교아동문학회 회장을 지냈다. 1959년 ‘문구멍’ 동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했고 평생 동시와 불교동화를 쓰고 있다. 1971년 세종아동문학상과, 1994년 방정환 문학상, 2003년 윤동주 문학상, 2011년 윤석중 문학상을 수상했다. 〈참새네 말 참새네 글〉, 〈어린이 팔만대장경 1,2,3〉, 〈소리 내는 탑〉, 〈슬기의 왕자〉 등의 저서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如是我聞)” 우리가 지금 읽고 듣고 쓰고 있는 부처님의 팔만법문은 아득한 시절, 그렇게 시작됐다. 그 시작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리는 아난다의 육성이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가장 정확하게 기억했고 분명하게 전했던 아난다. 그의 정성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금처럼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팔만법문을 모두 독파하고 아난다의 길을 가고 있는 이가 있다. 그것도 시대의 미래인 아이들에게 “여시아문”하고 있는 이가 있다. 40여 년 동안 아동문학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있는 前 한국불교아동문학회 회장 신현득 작가이다. 박도일 수필가 doil3012@daum.net

새싹 문학포교에 관심갖다
1959년 동시 ‘문구멍’으로 등단
1982년 한국불교아동문학회 창립
상주포교당서 어린이법회 조직

경전서 불교아동문학을 보다
〈본생경〉 읽고 불교동화집 발간
첫 작품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童心에 부처님 가르침을 담다
3년여 동안 〈팔만대장경〉 독파
1991년 〈어린이 팔만대장경〉 발간

원망으로 시작된 불연
신현득, 그는 ‘퐁당퐁당’, ‘고추 먹고 맴맴’ 등 1200여 편의 동시를 짓고 800여 편의 동요를 낳은 한국 아동문학의 아버지 윤석중 작가의 뒤를 잇는 한국 아동문학의 큰 줄기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세가 온전한 집안이 있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의 집안도 일제의 수탈을 피해갈 수 없었다. 아쉽지 않았던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였다. 그의 모친이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9남매 중 4남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난다. 한참 동심의 마당에서 뛰놀아야 할 소년 신현득은 어머니가 그리웠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반대편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은 삭발염의만 하지 않았을 뿐 생활은 거의 출가자였다. 집안보다는 절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고 식구를 챙기는 시간보다는 불경을 외는 시간이 더 많았다. 신 작가의 부친은 신 작가가 태어나기 전부터 일찍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쫓았다. 집에 돌아와 있어도 마음은 늘 산문에 있었다. 신 작가는 힘겨운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아버지가 입에 달고 사는 뜻 모를 불경이 또한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신 작가는 알지 못했다. 그 원망스러운 문장들이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훗날 자신이 평생 의지하고 살아가게 될 아난다의 육성이었다는 것을. 신 작가의 불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0년 봄, 소파 방정환 선생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동화구연가 이해창 씨, 소파의 장남 방운용 씨, 신현득 씨.

문학, 아버지 그리고 불교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동사무소 급사로 취직한다. 배움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그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는 곁에 있는 책들을 보이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그는 책 속에서 ‘문학’을 발견한다.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배움의 열망을 이어간다. 그는 병산중학교를 거쳐 안동사범학교에 진학한다. 그의 문학에 대한 모색은 소설쓰기로 이어졌다.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가던 그 때, 그는 성경을 접하게 된다. 당시의 시대상이 그랬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다니며 성경을 배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신 작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대의 보편적 상황과 이별한다. 성경을 대하면 대할수록 그는 성경과 점점 멀어졌다. 왠지 자신의 정서와 맞지 않았다. 그는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 마을인 중률초등학교를 거쳐 상주초등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게 되는데, 그 무렵부터 그는 서양의 정서인 성경 대신 유교경전과 불교경전을 읽기 시작한다. 그는 〈금강경〉, 〈천수경〉 등을 읽으면서 그 문장들이 아버지와 함께 그토록 원망했던 그 옛날의 문장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옛날 자신의 아버지가 그토록 그 문장에 의지했던 이유를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신 작가는 원망했던 아버지를 조금씩 다시 생각하게 됐고, 아버지가 매달렸던 그 문장들에 빠져들어 가면서 어느 새 탄탄한 불자가 되어갔다.

동심은 불성…어린이법회 창립
“늘 아이들과 있다 보니 언제부턴가 나의 모든 생각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언젠가는 삶이 아이들의 동심을 가져갈 테지만 그 아름다운 시절에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것은 다름 아닌 문학과 불교였어요.”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시절을 맡는다. 매일같이 아이들 속에서 살다보니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힘든 시절을 사느라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던 동심, 신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언젠가 어른이 될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 작가는 아이들이 동심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길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에게 동시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자신도 동시를 쓰기 시작한다.

“동심은 곧 불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심을 잃지 않는 것은 불성을 잃지 않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 문학과 더불어 부처님의 말씀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신 작가는 당시 상주포교당 주지 스님을 찾아간다. 그는 어린이회를 조직하고 일요법회를 열어 아이들을 부처님 곁으로 부른다. 그리고 경전 속에서 아이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골라 법회에 모인 아이들에게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들려주기 시작한다. “여시아문”

 

아동문학 평론사 주최, 소파 묘소 참배 대학생 동시쓰기 백일장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신현득 씨(사진 첫째 줄 왼쪽 첫 번째)

〈본생경〉을 만나다
“빠꼼 빠꼼 / 문구멍이 / 높아간다. // 아이 키가 / 큰다.”

신 작가는 상주초등학교 재직 시절인 1959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에서 ‘문구멍’으로 등단하며 아동문학가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1961년, 그는 첫 번째 동시집 〈아기눈〉을 출간하며 아동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신 작가는 김종상, 박경용, 조유로 작가 등과 함께 한국 동시문학의 전성기를 열어간다. 그러던 1975년 여름, 그는 20여 년간 잡았던 교편을 놓고 소년한국일보에 입사한다.

신 작가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동시를 가르치고 포교당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또 한 번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는 좀 더 많은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자신의 학교 아이들과 마을 포교당에서 만나는 아이들로 그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 작가는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동심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깨끗한 글과 동심과 한 가지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좀 더 많은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자라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신문사의 일은 학교 교사로 일할 때보다 훨씬 더 바빴지만 그는 그 자신 또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대원불교대학에 입학해 불교 공부를 이어간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전기를 맞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방대하고 그 속에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본생경〉을 본 순간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본생경〉 자체가 한 권의 동화집이었죠. 세계 아동문학사에서 〈본생경〉을 세계 최초의 동화집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그렇다. 〈본생경〉은 세계 최초의 동화집이다. 우리나라 고대소설인 〈두껍전〉, 〈토끼전〉, 〈옹고집전〉의 원형도 〈본생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부족한 공부를 채우기 위해 입학한 대원불교대학에서 〈본생경〉을 보게 됐고, 그 속에 무궁무진한 동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본생경〉을 시작으로 〈팔만대장경〉 속의 경전을 한 권 한 권 읽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로만 들려주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동화로 만들어야겠다고 발심한다. 그는 동화로 엮을 부분을 고르고 정리하면서 〈팔만대장경〉을 모두 읽는데 꼬박 3년이 걸렸다.

“〈본생경〉을 비롯해서 〈팔만대장경〉 속에는 수 천 편의 동화가 될 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모아 책으로 만들면 아마 책 100 권은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팔만대장경〉은 동화의 보고입니다.”

 

신현득 作 <어린이 팔만대장경>

본격 불교동화집 〈어린이 팔만대장경〉 출간
〈본생경〉 속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동화를 발견한 신 작가의 마음은 마치 금맥을 찾은 광부의 마음과 같았다. 불교만 가지고도 아동문학의 커다란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동문학 중에서도 ‘불교아동문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신 작가는 이 원력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82년, 그는 석주 스님의 도움을 얻어 사범대 동문인 김종상과 수필가 김진식, 시조시인 진우 스님 등과 함께 한국불교아동문학회를 창립한다. 원로 김동리 선생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본격적으로 불교아동문학이라는 큰 집을 짓고 싶었어요. 타종교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각종 책자와 교재를 발간하며 선교에 힘쓰는데 반해 불교는 제대로 된 아동용 교재 한 권이 없었어요. 저 개인의 원력에서 그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 해, 그는 마침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그의 첫 불교동화집을 발간해 교계와 아동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리고 1989년, 신 작가는 불교동화 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소년한국일보를 그만 둔다. 〈팔만대장경〉 속에서 동화책 100 권을 본 신 작가로서는 시간이 너무 모자랐던 것이다.

1991년 그는 드디어 〈본생경〉에서 가려 뽑은 이야기로 재구성한 본격 불교동화집 〈어린이 팔만대장경〉을 발간한다. ‘구덩이에 빠진 대왕님 이야기’, ‘임금님은 알아들어요’, ‘야차와 재채기’ 등 33편의 동화와 ‘불교에서 쓰는 낱말풀이’로 엮은 〈어린이 팔만대장경〉은 아이들 마음에 지혜와 불성을 심어주는 부처님 말씀이 누구보다 동심을 소중히 생각하는 신현득만의 언어로 새롭게 그려져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뜻을 그대로 살려서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렇다. 〈어린이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요지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동화로 그려내 아이들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준다. 쉬운 언어를 쓰면서도 부처님의 깊은 뜻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신현득 작가가 한국 아동문학과 불교아동문학의 큰 줄기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동심에 대한 깊은 관심과 불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후 〈어린이 팔만대장경2, 3권〉을 비롯해 〈부처님 말씀 이야기 바다〉 〈잠자는 부처님〉 〈날아다니는 목련존자〉 〈슬기의 왕자〉등을 연이어 발표한다. 지금까지 그는 동시집 30여 권과 동화집 20여 권을 출간했다. 동시집 30여 권 속의 1000편이 넘는 동시 속에는 ‘가야산’, ‘아기 왕자가 나던 날’ 등 그의 불교적 상상력이 이끌어낸 불가적 동시들이 함께 있고, 20여 권의 동화집 속에는 11권의 불교동화집이 있으며, 그 불교동화집은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에서 온 것이다.

 

2012년 제29회 한국불교아동문학회 주관 한국불교아동문학상 시상식 모습

“불교동화 출간은 중대한 미래 불사”
“10년 전에 탈고한 〈부처님 이야기 365일〉을 아직도 출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연간 발간되는 아동문학집의 절반이 자비로 출판되고 있습니다. 불교아동문학집의 출간 역시 힘든 상황이지요. 경전속의 부처님 말씀을 불교동화집으로 만드는 일은 단순한 출판이 아닙니다. 불교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작가는 책 100 권 중에서 이제 겨우 몇 권의 책을 낸 것이라며, 불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불교동화집 출간은 중단할 수 없는 불사 중의 불사라고 했다. 아울러 교계와 불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바란다고 했다.

“동시와 동화를 쓰기 위해선 동심을 잃지 않아야 해요. 동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사물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가의 나무와 이야기 할 수 있고, 풀숲 벌레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모든 것에 불성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동심은 곧 불성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팔십을 넘긴 신 작가는 아직도 동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동심을 잃지 않는 것은 곧 불성을 잃지 않는 일이라며 그것은 동화작가로서뿐 만 아니라 불자로서도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계속 동화를 쓴다고 했다. 그 옛날 칠엽굴에서 아난다가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해 전했듯이 신 작가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부처님의 이야기를 해맑은 동심으로 암송하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