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사찰 순례 ④ 대자은사·흥교사

대자은사 광장에 있는 현장 스님 동상. 뒤로 현장 스님이 인도서 갖고 온 경전 등을 수장하기 위한 대은탑이 보인다.
경·율·론 삼장을 모두 터득한 고승을 의미하는 삼장법사. 일반적으로 <서유기>에서 손오공 등을 이끌고 천축국으로 가는 고승을 삼장법사로 알고 있다. <서유기> 실질적 주인공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은 당나라 시기 구법승 현장 스님이다.

현장 스님은 602년 진씨 집안의 4째 아들로 태어났다. 10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앞서 출가한 둘째 형을 따라 삭발하고 수행자의 길을 걷는다. 고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수행을 할수록 종파마다 교리가 달랐다. 의문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 직접 인도로 가서 불경을 구하고 배우기로 결심한다.

서유기 모델 현장 스님 자취담긴
中 서안 대자은사 대안탑·흥교사
현장 스님 구법행·역경불사 인해
지금의 동아시아 불교 존재 가능
제자 규기·원측 간 스토리도 눈길

현장 구법행 첫 장애물 ‘당 조정’
<서유기>를 보면 현장 스님이 천축 구법행을 알리자 당 태종은 잔치를 열고 환송해준다. 진리의 구법행이 마치 왕조를 위한 출사로도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과 판타지는 다르다. 안타깝고, 울화가 치민다. 당시 당나라는 국외 여행이 금지돼 있는 상황. 이 때문에 현장 스님은 수 차례 조정에 “구법행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지만 각하됐다. 결국 현장 스님은 국법을 어기고 629년 인도로 떠난다. 당시 불교국가였던 고창국과 천산산맥을 넘어 결국 중인도 나란다대학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5년을 머무르며 자신이 그토록 배우고 얻고자 했던 <유가사지론>을 비롯한 유식의 교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인도 각지에 구법과 불적 순례의 여행을 계속해서 다수의 불전을 얻어서 귀로에 나섰고, 17년만인 645년에 이번에는 환영을 받으면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현장 스님은 구법 여정을 통해 불사리 150개, 불상 8체, 경전 520권 657부를 중국에 전했다. 이에 크게 기뻐한 당 태종은 현장 스님에게 직접 역경 사업을 명하게 된다. 이후 현장 스님은 입적 전까지 역경에 매진하게 된다.

조계종 교육원 선종사찰순례단이 대자은사에 조성된 현장 스님 일대기 조각들을 보고 있다.
현장의 역경처 ‘대자은사’
현장 스님의 역경처 중 한 곳이 현재 중국 서안에 있는 대자은사다. 현장 스님이 처음 황제의 명을 받아 역경을 시작한 곳은 흥교사이고, 이후 대자은사로 옮겨 역경을 했다. 스님은 대자은사 북서쪽에 지어진 변경원에서 불경 한역(漢譯)에 힘썼고, 11년에 걸쳐 40여 부의 경을 한역했다. 이 한역 사업에는 현장 스님의 제자인 규기와 신라 유학승 원측도 참여했다.

원래 대자은사는 당 태종의 모후 문덕황후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찰이다. 한때는 승려 수만 300명이 넘을 정도로 대찰(大刹)이었다. 대자은사에서 현재까지 유명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대안탑이다.

652년(당 영휘 3년)에 건립된 대안탑은 현장 스님이 인도로부터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수장하기 위해 지어졌다. 7층 전탑으로 높이가 54m에 이르며, 각층 마다 사리가 봉안돼 있다. 지금은 내부에 계단이 설치돼 이전보다는 수월하게 탑의 최상층까지 오를 수 있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난 창을 통해 서안 시내가 조망이 가능하다. 남쪽으로는 현장 스님의 동상이 있는 광장이 있으며, 북쪽 뒤로는 분수 광장이 있다. 분수광장 좌우로는 현장 스님의 기념관도 보인다.

현재 대자은사 주위는 중국 시민을 위한 광장과 편의·상업시설이 대규모로 조성돼 있다. 중국인들은 일과를 마치면 이곳에서 운동을 하거나 외식을 하며 여가를 즐긴다. 사찰 참배도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모습이다.

대자은사 인근에 조성된 상업광장. 파노라마가 눈길을 끈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대자은사 옆으로 길게 조성된 ‘진한당국제문화상업광장(秦漢唐國際文化商業廣場)’이다. 천장에 설치된 파노라마 스크린을 통해서 중국 불교 문화재와 관련한 영상이 계속 흘러나왔다. 중국에서 불교가 갖는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었다.

달마가 선(禪)을 전했다면, 현장은 부처님의 바른 교법을 전달했다. 이는 동아시아 대승불교 역사의 근간을 이루는 일이었다.

대자은사 대웅보전에는 현장 스님을 선양하는 조박초가 쓴 주련이 있다. 이를 보면 현장 스님이 가지는 위치는 명확하다. “불법의 바다가 현장 스님을 숭앙하니 서역도 두루 깨달은 자라고 말했다. 유식학을 널리 펼치니 이곳은 나란다에 비할 수 있다.”

흥교사의 현장사리탑과 제자 규기, 원측의 사리탑. 현장의 유식종을 이어받았고, 이는 신라로 전해진다.
현장과 그 제자들이 잠든 흥교사
현장 스님의 사리는 서안의 흥교사에 모셔져 있다. 주목할 점은 현장 스님과 제자인 원측과 규기의 사리탑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현장과 제자들의 사리탑은 현장의 구법 여정과 역경사업, 중국과 신라의 유식종 탄생이라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이 함축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현장 스님은 구법행과 역경사업을 통해 <성유식론> 등을 바탕으로 한 유식종을 창종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제자 규기와 원측이다. 특히 현장은 제자 규기를 많이 아꼈다. 워낙 총명했던 규기를 제자로 맞이하기 위해 현장은 스님으로서는 금기인 술, 고기, 여자를 모두 허용하겠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그래서 규기를 ‘삼거(三車) 법사’라고도 한다.

원측 역시 뛰어난 제자였지만, 규기와 같은 혜택은 받지 못했다. 이는 유명한 ‘도강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규기는 현장 스님의 유식론 강의를 독점했고, 원측은 문지기를 매수해 그 강의를 몰래 엿들었다. 정식 강의는 규기가 앞서 들었지만, 이를 자기화해서 강론을 펼친 것은 원측이 먼저 였다. 국내 학계에서는 일련의 도강 사건을 규기 측에서 후대에 날조한 것이라 본다. 원측의 인품으로 도강할 이유도 없고, 실력도 한 수 위라는 것이다.

흥교사에 봉안된 현장과 제자 규기, 원측의 조각상.
현장 스님의 입적 후 규기는 자은사를 중심으로 자은학파를, 원측은 서명사를 중심으로 서명학파를 형성한다. 규기의 자은학파는 유식종의 정통이자 주류임을 자임했고, 서명학파와는 많은 쟁론을 펼쳤다.

그럼에도 원측은 측천무후 등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당시 장안의 최고 사찰 중 하나인 서명사의 대덕으로 주석하며 강론을 펼쳤다. 신라에서 수차례 원측의 귀국을 타진했지만, 그의 실력을 인정한 측천무후의 반대로 귀국은 이뤄지지 않았고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입적한다. 이후 원측의 제자 도증이 신라로 귀국해 태현에게 유식학을 전하면서 신라의 유식종이 시작된다.

흥교사 현장사리탑 동쪽에는 원측의 사리탑이 서쪽에는 규기의 사리탑이 각각 있다. 현장의 원력으로 시작된 구법행은 역경으로 기반을 만들고, 유식학 전파라는 결실을 맺는 과정이 담겨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한 명의 원대한 원력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우뚝 서 있는 세 탑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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