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불교와 '닭'

닭은 예로부터 하늘의 메신저
건국신화·신령한 장소 이름 남겨
禪師들은 닭 울음에 깨달음 얻기도
불교선 군다리보살·진달라 화신

효산 성타 스님作(기장 동림사)
한국인과 닭
꼬끼오~!’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십간 중에서 정()은 붉은색을 의미하니 올해는 붉은 닭의 해다. 닭은 예로부터 어두운 새벽녘에 홀로 울어 밝은 태양을 불러들이는 상서로운 존재로 인식됐다. 특히 고대 한국인의 의식 속에 닭은 신성한 새, 신조(神鳥)로 남아있다.

월간 현대양계발행인 이희훈이 출간한 한국의 재래닭은 우리나라서 최초로 닭을 기록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을 통해 기원 전부터 한반도에 재래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조명했다. 이처럼 오래된 닭의 역사만큼 닭은 우리나라 각종 신화와 지명에 그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가장 오래된 신화는 신라로부터 출발한다. 신라는 국명이 정해지기 전 탈해왕 때까지 계림(鷄林)으로 불렸다. 탈해왕 9(65) 3월 어느 날 밤 왕은 월성 서쪽 시림(始林)이라는 숲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금색 궤짝서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금궤에서 태어났다고 성을 김이라 불렀다. 이후 이곳을 계림(鷄林)이라 했으며, 김씨가 왕이 되어 나라가 번영할 땐 나라 이름을 아예 계림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 박김 씨 시조의 탄생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바다를 건너오거나, 알에서 깨어나는 난생설화가 대부분을 이룬다. 고대인의 관념에 새는 하늘과 땅의 메신저역할을 한 신성한 존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도인들의 수행처로 유명한 계룡산도 닭과 관련 있다. 천황봉(845m)을 중심으로 연천봉문필봉삼불봉관음봉 등 엇비슷한 높이의 봉우리들이 늘어선 모습이 닭 벼슬을 쓴 용을 닮았다는 것이다. 혹은 조선 개국 당시 무학 대사가 금계포란(錦鷄抱卵)과 비룡승천(飛龍昇天)의 명당이 합쳐진 형국이니 계룡이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한 말에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계룡산은 신라시대엔 5악의 하나로 분류돼 제왕들의 제사 터로 쓰이기도 했다.

이 계룡산에 자리한 청량사지 쌍탑엔 재밌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신라 선덕여왕 원년에 당승 상원 대사가 이곳에서 움막을 치고 수도할 때 목에 가시가 걸린 범 한 마리를 구해 줬다. 이튿날 범은 보답으로 한 처녀를 물어다 놓고 사라졌고 둘은 꼼짝없이 한 움막에서 겨울을 나야 했다. 부부의 연을 맺자고 애원하는 처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던 스님은 의남매를 제안했고 둘은 평생 불도를 닦다 한날한시에 입적했다고 한다. 남매탑, 오뉘탑 등으로 불리는 이 쌍탑은 계룡산을 대표하는 풍경이 됐다.

닭의 울음, 사람을 깨우다
닭의 울음은 개벽의 소리다. 건국 신화에 닭이 출현하는 이유도 태초의 소리로 새 시대를 깨우는 임금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징성에 기대 선승들은 닭 울음소리를 인간을 깨우는 소리로 종종 비유하곤 했다.

서산대사는 젊은 시절 지리산 암자를 전전하며 정진하던 가운데 큰 의문에 부딪혀 울증(鬱症)에 시달렸다. 이 와중에 용성(龍城:전북 남원)에 사는 벗을 만나러 가는 도중 별마을(星村)을 지나다가 한낮 닭 우는 소리에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을 깨달아 연거푸 두 수의 시를 읊는다. 오도송(悟道頌) 탄생의 순간이다.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이미 말했네
오늘 닭우는 소리 들으니
대장부 할 일 마쳤네
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今廳一聲鷄 仗夫能事畢

조계종 전계대화상 성수 스님은 법문집 저 건너 산을 보라서 절박한 심정으로 불법을 구하는 한 거사에게 닭 울음 소리에 빗댄 이야기로 타일렀던 일화를 소개했다.

거사야! 어서 집에 돌아가서 닭 우는 소리를 보라! 그 소리는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니, 그것은 마치 못 속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아서, 그처럼 차 있는 소리를 보면 곧 진리가 인식 되리니, 그 소리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흙물도 없고 빠질 곳도 없으며 고락(苦樂)이 없는 도리를 알리라!”

성수 스님은 닭 울음소리를 보고 진리와 하나 되면 본래 진흙물도 없고, 거기에 빠질 사람도 없으니 고락의 이분법적 생각이 붙을 수가 없음을 역설했다.

벽암록에 견색명심 문성오도(見色明心 聞聲悟道)란 선어가 있다. 사물 색상에 응해 심성을 밝히고, 자연의 소리로 본성을 깨친다는 뜻인데 이처럼 선사들은 닭 우는 소리로 깨달음이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부처님이 설법한 무아론(無我論)에 대한 가르침을 펼치는 데도 닭이 등장한다. 밀린다팡하(밀린다왕문경)엔 고승 나가세나와 고대 인도 찬드라굽타 시절 왕 밀린다가 나눈 허심탄회한 불교문답이 전해져 온다.

불교에 조예가 깊던 밀린다 왕은 무아가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지 의문을 품었다. 이에 나가세나는 윤회란 닭이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닭이 나오며, 이 닭 역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생과 사는 결코 중단되는 때가 없고, 이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는 영혼 같은 존재도 없다고 답했다. 이것은 무아윤회(無我輪廻)를 일컫는 말로 아트만(참자아)’ 존재를 주장하는 브라만 전통과 가장 분별되는 특징이다.

군다리보살, 중생을 치료하다
천수경에서 닭은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군다리보살의 화신으로 불린다. 군다리는 감로병(甘露甁)이란 뜻으로 군다리보살은 늘 감로병을 들고 감로수를 뿌리면서 중생을 구제한다. 군다리보살이 싸우는 대상은 우리들 마음속에 숨어있는 탐치 삼독심이다. 그래서 옛 조상들은 닭을 통해 나태와 방일(放逸)과 타협하지 않는 주체성을 다짐했다.

부지런함주체성과 더불어 꼿꼿한 닭벼슬서 풍기는 당당함과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시간을 알리는 성실성 등을 갖춘 닭은 조선시대에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사람들에겐 그림 주제로 애용됐다. 닭의 볏이 관을 쓴 모양과 닮아 벼슬길에 오를 것을 상징하기도 했다.

닭은 또한 약사여래를 수호하는 12나한 가운데 진달라(眞達羅)를 상징한다. 진달라는 나쁜 왕이나 강도 등 고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호법신장이다. 쇠몽둥이를 들고 닭 머리에 사람 몸둥아리 모습을 한 진달라(眞達羅)대왕은 고대 인도의 귀신 야차가 불교 신화로 편입돼 나약한 인간을 보호하는 수호신장이 됐다.

2016년 불안한 정국에 고통 받은 국민들은 정유년 군다리보살과 진달라대장의 보호를 기도한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듯, 정유년엔 난세를 정리하고 불국정토가 도래하길 불자 모두는 염원한다.

정유년(丁酉年) 불교사
457년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 신라 눌지왕 때 불교 전래

577년 백제의 검단선사, 선운사 창건. 보물 제290호 대웅보전, 297호 금동보살좌상, 280호 지장보살좌상 등 19점 유물과 천연기념물 제184호 동백나무 등 있음. 창건 당시 89개 암자에 3,000여 승려들이 수도했다고 전해짐.

577년 백제가 일본에 경론과 율사, 기술자 등을 보내 일본불교 지원.

일본서기에 의하면 57711월 백제 국왕이 승려와 함께 조불공(造佛工)과 조사공(造寺工) 2명을 일본에 보냈다고 함. 조불공은 금동불을 주조할 수 있는 공인, 즉 불사(佛師)이며, 조사공은 거대 목조 건축을 지을 수 있는 건축 관계 공인.

백제의 불교 전파는 경전을 통해 한문을 깨치는 일본인들이 증가하면서 일본의 지적 수준을 급격히 향상시켰고, 불교건축 등 새로운 기술 유입 등으로 인해 아스카시대의 문명개화를 촉발시키는 중대한 역할을 함.

637년 신라 선덕여왕 당시 자장율사가 광덕사 창건. 당시 중국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 치아, 가사, 화엄경 등 봉안 창건.

697년 발해 고왕 당나라와 불교 외교.

817년 이차돈은 혼자 불교의 공인(公認)을 주장하다가 순교를 자청하여 마침내 주살됨. 그는 죽을 때 "부처가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목을 베니 피가 흰 젖빛으로 변하여 한 길이나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남. 이에 모두 놀라고 감동해 528년 드디어 불교를 공인. 전설에는 그가 죽을 때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 경주 북쪽에 있는 금강산이며, 그곳에 817년 헌덕왕 때 승려 혜륭이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음.

1177년 서경 민중봉기, 담화사 근거로 투쟁. 승려들을 봉기군으로 징발함.

1177년 표충사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 국보 제75) 제작. 1177(명종 7)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고려시대 향로.

1237년 몽골군의 1232년 침공에 의해 초조장경(初雕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의 판본이 모두 소실되자 고려 조정에서 다시 대장경 제작에 착수. 1237년에 시작해 1248년에 완성된 대장경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 중인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즉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1357년 금강반야바라밀경 제작. 보물 제877. 1357(공민왕 6)에 선종의 근본경전인 금강경에 육조 혜능의 주해본 중 김저(金貯)가 소장한 원나라 판본을 저본으로 전라도 전주의 덕운사에서 지선(志禪) 스님이 복각 간행한 금강경 주해본의 일종.

1417년 불교를 옹호하던 태조가 죽자 대대적인 사원 정리에 나서 절과 승려의 수, 절의 소유지를 대폭 줄이고 서운관에 소장된 각종 밀교 경서 모두 불태워짐.

1597년 의승군, 울산석주관 전투 참가.

1777년 영광 불갑사 팔상전 영산회상도(靈光 佛甲寺 八相殿 靈山會上圖) 제작.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행한 설법광경을 도설. 비현 등 15인 불화승이 제작.

1897년 승려 도성출입금지령을 해제.

1957년 한국전쟁 때 소실 된 인제 백담사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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