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힘 아닌 열린 불교를 지향해야

불교계는 달라져야

한국불교는 달라져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전 속에만 담겨있을 뿐 살아 움직이는 일상생활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진리는 열려 있으나 사찰은 닫혀있다. 법당 문은 열려 있으나 승려의 의식구조는 막혀 있다.

불교TV의 화면에는 온통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영험 설화가 법복을 걸친 스님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사찰을 알리는 홍보 선전물이 마치 구걸하듯 신도들에게 권선문으로 다가온다. 조계종출판사에서 매년 발행되는 사찰 달력 뒷장에 원진살, 상충살, 들삼재, 날삼재가 빼곡하게 박혀있음에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보는듯해 안타까움이 그지없다. 사찰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영가천도에 500만 원, 1000만 원 이상을 요구하는 사찰이 부지기수요, 대학입시 합격기도 동참금도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한국불교는 좌불 신앙이 뿌리가 깊어서인지 변화를 두려워하며 받는 불교에 익숙해져 있다. 육바라밀의 으뜸 덕목인 보시(布施)에 있어서도 승려는 베푸는 일에 매우 인색하다.

초청법회에 초대되는 스님일 경우 연륜과 수행력도 화려할 터인데 법회가 끝난 후 주최 측에서 내미는 돈이 든 봉투를 꼬박꼬박 챙겨가는 모습도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스님이 재보시(財布施)는 못하더라도 법보시(法布施)는 당연한 몫이고 의무일 터인데 한 시간 남짓 법문하고 50만 원, 100만 원을 챙겨간다니 법보시를 실현할 날이 언제일지 묻고 싶다. 제발이지 먹여 살릴 부양가족이 없는 스님들이 가난하게, 검소하게, 깨끗하게, 당당하게, 솔직하고 진솔하게 정진하는 기본자세를 잃지 않으며 상식이 통할 수 있게 개운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조계종단에는 100여 곳이 넘는 대중선원이 있다. 여름ㆍ겨울의 안거 기간에 2~300여 명의 수행승들이 모여 정진하는 모습에서 한국불교의 희망을 본다. 다만 수행하는 방법과 간화선(看話禪)을 참구하는 간절심에 대해 뼈아픈 성찰과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 짜인 시간표에 의해 죽비소리에 길들여지는 도식화된 화두(話頭)로는 간절심이 이어질 수 없을 뿐더러 선, 후배가 한 방에서 정진하는 편안한 풍토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선원에서 수행의 외길을 걸어오신 어느 원로 스님께서 오매일여(寤寐一如)를 간화선(看話禪)의 마지막으로 거쳐야할 단계로 설명하고 있음은 지극히 왜곡된 안타까운 일이다. 〈육조단경〉의 주인공인 행자 혜능은 참선에 대한 기초와 습의 과정도 없이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절차 없는 참모습을 보여주질 않던가. 〈종경록(宗鏡錄)〉에서 연수선사가 밝히고 있듯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 근기에 따라 빠르고 더딜 수 있음을 인정해야 옳은 것이다.

한국의 선불교에는 스승다운 스승이 방장이나 조실을 맡아 후학을 지도하는 게 아니라 문중의 서열 위주로 자리에 오름은 개탄하고 개탄할 일이다. 조실, 방장이 법력(法力)의 개안종사(開眼宗師)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문중의 서열 다툼으로 자리차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활발발(活潑潑)한 법거량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20년, 30년 선원에서 안거(安居)한 수행경력이 화려한 자랑거리로 등장하는 현실은 부끄럽고 마음 짠한 달라져야 할 일이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달라져야 하는 것은 출가집단인 스님 쪽이다.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으나 승려생활이 직업화되어 가는 느낌도 날이 갈수록 그 둘레를 넓혀가고 있다. 신도들의 주머니는 비어 있으나 주지스님의 주머니는 채워져 있다면 이것은 넌센스의 희극이요, 이솝우화이다. 신앙과 종교의식이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회에서도 환갑잔치, 칠순잔치가 사라진지 오래인데 출가 수행승이 버젓이 해마다 생일상을 받고 있다면, 환갑ㆍ칠순ㆍ팔순잔치를 벌인다면 이 어찌 수행승의 아름다운 회향으로 볼 수 있겠는가? 일부이긴 하나 고승(高僧) 생가(生家) 복원도 깊이 우려되는 바가 크다.

인도와 중국, 한국불교에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 조계종단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인물의 평가는 사후(死後) 최소한 100년 이상이 지나야 가능할 터이고 덕 높으신 스님일수록 생가 복원 따위로 덧칠할 필요도 더욱 없을 터이다. 꽃상여에 만장이 번거롭게 따르는 장례문화, 이 절(寺) 저 절(寺)로 옮겨 다니는 49재 풍습도 사라져야할 악습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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