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정토종 초조 혜원 대사

“요사이 선종들이 염불하며 정토를 닦는 이를 보고는 상에 집착하여(着相) 수행한다 하며 비방하고 참선ㆍ견성하여 진상(眞常)을 돈오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근기가 천박한 이들은 그 말을 믿고 염불도 아니 하고 경도 보지 아니하며 오염된 삶을 살고 있어서 입으로는 참선을 말하나 마음에는 도를 행하지 아니하며 정토를 비방하고 왕생을 믿지 아니한다. 이는 크게 잘못된 것으로 아미타불이 ‘위없이 깊고 묘한 선(禪)’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귀원직지(歸元直持)〉

 

한ㆍ중ㆍ일 최초의 수행결사인 백련결사를 이끈 중국 정토종의 초조 혜원(慧遠, 334~416년) 대사는 염불 역시 삼매로 깊이 들어가면 선과 둘이 아님을 몸소 보여준 선각자였다. 생전에 염불삼매를 증득하고 정토법문을 처음으로 중국 전역에 널리 알린 대사는 〈귀원직지〉에서 “참선ㆍ견성 코저 하면 다른 방편을 들 것 없이 다만 한마디 ‘아미타불’만 가지고 스스로 참구하며 염하여 오래되면 자연히 소득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는 설사 깨닫지 못하더라도 명(命)을 마칠 때 육도윤회를 벗어난 세계인 극락정토의 최고 경지인 상품상생(上品上生)을 얻을 것이라고 설했다.

 

도안 법사 〈반야경〉 강의서 깨달음

모든 학문은 ‘겨·쭉정이’ 절감

원흥 원년 백련사 조사로 추대

〈반주삼매경〉 기초 염불법 펼쳐

 

선종에서는 견성하고서도 확철대오하지 못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나기가 지극히 어려운 반면, 정토종에서는 업을 지닌 채 윤회를 벗어나는(帶業往生) 깊고 묘한 선(禪)이 염불법문이란 것이다.

 

도안법사의 ‘반야경’ 법문 듣고 깨달아

혜원 대사는 중국 진나라 하동땅 대주 지방의 안문군(雁門郡) 누번현(樓煩縣)에서 속성이 가(賈)씨로 탄생했다. 12세에 이미 유가의 학문을 두루 통달하여 세상사에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았다. 21세에 강을 건너 범선자라는 자와 같이 은거해 살까하여 아우인 혜지(慧持) 스님과 같이 가다가 중원에 난리가 나서 길이 막혀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태행산에 도안 법사가 계신다는 말을 듣고 혜지 스님과 같이 찾아가 예를 올리고는 그곳에서 머물면서 도안 법사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겨와 쭉정이 같은 것임을 절감한 대사는 아우 혜지 스님과 같이 삭발ㆍ출가 하였다. 도안 법사는 혜원 스님이 훌륭한 법기(法器)임을 아시고는 “앞으로 이 나라에 불법의 펴짐이 그대에게 달려있노라”고 극구 찬탄하였다.

그때 진나라의 불법은 인도로부터 들어온 지 삼백년이 지나 승풍이 문란해지고 불법이 점점 쇠잔해져 가는 때였다. 혜원 대사가 도안 법사를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다 양양(襄陽)에 머무르던 때 마침 전진(前秦)의 부견(?堅)이 침공하여 스승 도안 법사가 장안으로 연행되었다. 혜원 대사도 스승과 헤어져 남쪽으로 내려왔고, 호북성 형주 상명사(上明寺)로 옮겼다.

 

여산 동림사에서 30년간 동구불출(洞口不出)

대사는 그뒤 강서성 심양(?陽)에 이르러 여산(廬山)으로 들어가 서림사(西林寺), 즉 훗날의 동림사(東林寺)에 주석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30년 동안 한 번도 산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훗날 창작된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로 잘 알려져 있다.

대사의 철저한 수행과 교화 활동은 당시의 승풍을 바로잡고 불법을 다시 번창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새로운 수행결사의 중심지가 된 동림사가 창건되기까지 불보살의 보이지 않는 가피가 작용했다는 일화가 〈고승전〉 등 여러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혜원 대사가 오십 되던 해에 여산에 가 보니 산세가 수려하며 서기가 감도는지라 그곳에서 수행을 하고자 했지만 식수가 없었다. 그러자 대사께서는 주장자(?杖子)로 땅을 탁 치면서 말하길 “이곳에 우물이 생길지어다”라고 하니, 즉시 맑은 물이 솟아올라 우물이 되었다고 전한다.

대사는 그곳에 풀을 베고 터를 다듬어 조그만 암자를 지은 후 〈열반경〉을 강의하였다. 그랬더니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산신이 열반경 강의를 듣고 크게 감동하여 신력(神力)으로 하룻밤 새 큰집을 지을 수 있는 많은 재목(材木)과 집터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런 사실이 소문이 나자 그 고을 수령까지 감동하여 절을 크게 지어 동림사(東林寺)라고 이름을 붙여서 드렸다.

 

대장경 열람 후 가장 효과적인 정토 수행법 선양

그 당시 진나라에는 많은 경전이 미비한 상태였으며 특히 선법(禪法)은 아직 들어오지 않아 들어볼 수도 없었다. 대사는 그러한 선법을 펴려고 사내에 별도로 선실(禪室)을 마련해 놓고 멀리서 선사 한 분을 청해 대중들로 하여금 선(禪)을 닦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수행법이 너무나 어려워서 평범한 근기나 속인들은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대사는 모든 경전을 열람한 후 누구나가 행할 수 있고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수행법은 오직 정토법으로서, 염불수행보다 좋은 방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원흥(元興) 원년(402년), 대사는 승속을 초월한 제자 123인과 함께 여산 산중의 반야대에 있던 아미타불상 앞에서 왕생극락의 서원을 세우고, 백련사(白蓮社)의 조사(祖)로서 추대된다. 스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결사 대중 123인을 비롯해 무려 3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그들은 불철주야 염불수행에 매진하였다. 다만 대사의 염불행은 후세의 〈정토삼부경〉에 기초하여 오직 ‘아미타불’ 염불로 왕생극락을 목표로 하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이 아니라 〈반주삼매경〉에 기초를 두고 생전에 반주삼매(般舟三昧)를 닦는 점이 달랐다.

 

관불(觀佛)수행으로 16일간 반주삼매에 들다

반주삼매는 염불삼매의 일종으로 부처님을 관하는 관불삼매(觀佛三昧) 또는 부처님이 눈앞에 현전하는 불립삼매(佛立三昧)라고도 불린다. 7일 또는 90일 기간을 정하여 몸, 입, 뜻의 세 가지 업을 청정하게 가다듬어 바르고 온전하게 아미타부처님을 관하고 염한다. 이를 통해 삼매에 들어 눈앞에서 아미타부처님을 비롯한 제불(諸佛)을 친견하고 교화를 받아, 임종시에는 왕생하는 수행법이다. 실제로, 대사는 82세 되던 해 11월 초하루에 정(定: 삼매)에 들어 17일에 비로소 출정(出定: 삼매에서 깨어남)을 해 염불삼매의 깊은 선정력을 보여주었다.

“불법은 왕법(王法)에 종속된 것이 아니다”

중국에 비로소 정토법문과 염불행을 널리 전한 대사의 높은 덕은 당시 서천(西天)의 여러 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동방의 호법보살(護法菩薩)’이란 칭송을 받았다. 타국의 스님들까지도 혜원대사를 ‘대승도사(大乘道師)’라 하여 여산을 향해 향을 사루고 예배드리는 자가 많았다. 요나라 임금도 대사의 도덕을 높이 흠모하여 자주 뵙고 법문을 들었으며, 진나라 황제는 대사를 궁전에 모시려고 세 번이나 청했으나 핑계하여 응하지 않았다.

진나라 안제 때는 불법에 사태(沙汰)를 만나 많은 스님들을 잡아서 처형하는 것을 혜원 대사가 상소를 올려 그 환난을 모면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임금을 받들도록 하려는 것 또한 대사가 글을 올려 면하게 되었다. 대사는 “불법(佛法)은 왕법(王法)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며 정면으로 주장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다.

 

임종 7일전 아미타불ㆍ관음ㆍ세지보살 현신

어느덧 대사의 세수 83세(416년)가 되었다. 그해 7월 그믐날이었다. 저녁녘에 허공을 쳐다보니 아미타부처님의 금색신(金色身)이 허공에 가득 차보이며 부처님의 원광(圓光) 안에는 무량한 화불(化佛)이 계시며 관음(觀音) 세지(世智) 두 보살은 좌우에 모시고 서계시며 열네 줄의 물줄기가 광채를 내며 상하로 흐르는 가운데, 아름다운 음성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음성은 고(苦) 공(空) 무아(無我) 무상(無常)의 묘법을 설해주고 있었으며, 그 밖에 가지가지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장엄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모든 광경이 〈관무량수경〉에서 설해 놓은 16관(觀)의 풍경과 하나도 다른 바가 없었다.

이때, 아미타부처님이 혜원 대사에게 말씀하시길 “나의 본원력(本願力)으로 너를 위안해주기 위해 왔노라. 앞으로 7일 후면 나의 국토인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혜원 대사 보다 앞에 세상을 떠난 불타야사(佛陀耶舍)라는 스님과 아우인 혜지 스님과 유유민(劉遺民) 거사 등이 부처님 곁에 같이 있으면서 대사를 보고 읍(揖)하여 말하기를, “법사께서는 저희들보다도 훨씬 앞에 뜻을 내셨거늘 왕생극락이 어찌 이처럼 늦으십니까?”라고 하는 말이 분명하게 들려왔다.

 

“삼매의 왕인 염불삼매로 윤회 벗어나라”

대사는 8월 1일부터 약간의 병세를 보이더니 6일에 대중이 술로 된 약을 권하니 드시지 않고, 꿀물을 권하니 율사에게 물어본 후 마셨다. 이날 대사는 유언으로 “정성이 지극하면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시는 것이며, 결정코 극락세계로 접인(接引)해주실 것이니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염불에 노력하여 힘쓸지어다.”라는 말을 마치시고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합장하여 염불하고는 세상을 떠났다.

염불종의 창설주로서 ‘반주삼매’를 강조한 염불법문을 세상에 널리 전한 혜원 대사. 그는 〈염불삼매시집서(念佛三昧詩集序)〉에서 “삼매 중에 가장 공덕이 높고 나아가기가 쉬운 염불삼매를 증득하게 되면 왕생극락은 필연지사”라며 일심으로 염불에 전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평생 참선이나 위빠사나를 해도 득력하지 못한 분들은 가장 간편하고도 효과적인 염불삼매를 증득하여 살아서는 안심을 얻고 숨을 거둘 때는 윤회계를 벗어나 정토에 왕생하시길 간절히 발원한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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