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것은 아름답다. 생명의 신비는 경이롭다. TV에서 곤충의 세계를 펼쳐 보일 경우 빨려들듯 지켜본다. 남극에 살고 있는 털북숭이 애벌레는 두 달에 못 미치는 짧은 여름기간에 먹이를 섭취하고 10개월에 가까운 긴 겨울동안 얼음덩이 속에서 생물학적으로 일체가 정지된 죽어있는 상태로 지내다 다시 얼음과 쌓인 눈이 녹으면 살아난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적과 같다

‘감사·고마움·미안함’ 생활화 하자

그런 상태를 7년 동안 반복한 후 고치를 짓고 나방이 되는 것이다. 화면을 설명하는 곤충학자는 영하35도에서 70도에 이르는 혹한기의 겨울기간동안 이 털북숭이 애벌레는 몸의 온갖 기능이 멈춰 냉동곤충으로 있다가 햇살에 의해 다시 죽음에서 부활한다는 것이었다.

매미는 7년을 나무뿌리의 흙속에서 굼벵이로 머물다 나무에 기어올라 허물을 힘겹게 벗고 매미가 된다. 매미로서의 일생은 보름 남짓이다.

하루살이는 물속에서 애벌레로 머물다 허물을 벗고 하늘로 날아오르는데 하루살이의 일생은 하루일뿐이다. 이 짧은 하루 사이에 사람으로 치면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모두 꿈결처럼 보내며 짝짓기도 하고 알까지 남기며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하루살이나 매미의 보름에 비하면 사람의 일생은 지겹도록 길고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과정이 아득하게 느껴질 수 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지구촌에서 가장 오래 산다는 미국의 화이트마운틴에 사는 ‘브리스틴콘’이라는 나무는 3500년의 나이를 지니고 있고 영국의 웨일즈에는 4000년이 된 주목도 아직 푸른 잎새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사자암의 법당 뜰에도 수령 400년이상 된 느티나무가 200~300년 된 아우들을 서너 그루 거느리고 버티어 창창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여기에 비하면 사람들의 일생은 매미의 보름동안의 삶이자 하루살이의 하루 일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사람에겐 죽음이 있어 더욱 삶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법이다.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다보면 명구(名句) 들이 많지만 아킬레스 장군이 독백하듯 내뱉는 ‘신(神)이 인간을 부러워하는 것은 인간에겐 사랑의 흔들림과 죽음이 있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강하게 다가온다.

그렇다, 역설 같지만 사랑은 흔들려야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죽음의 마침표가 있어야 오늘의 삶이 소중하고 아름다움으로 채우려는 최선의 노력이 깃드는 법이다. 늙는다는 것은 썰렁한 아쉬움의 눈물방울일 수 있으나 곱게 늙어가며 세월의 무게를 받아들임의 섭수철학으로 승화시킬 수 도 있을 터이다. 들숨 날숨이 연결 안 되는 육체적 죽음은 일생에 있어 한 차례뿐이지만 정신적 방황과 시련으로 겪는 절망의 터널에 갇힌 죽음은 수 수십 차례 누구나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윤회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7년의 세월동안 털북숭이 애벌레가 되어 얼음 속에 갇혀 살기도 하고 나무뿌리의 흙속에서 굼벵이의 고된 삶을 인내로 견디며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또 하나의 털북숭이 애벌레이자 굼벵이인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흉측한 벌레처럼 오늘을 사는 오늘의 주인공들은 두 눈 멀건히 뜨고도 팍팍하고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또 한 마리의 옷 입은 벌레로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리는 법이다. 마음의 빗장을 풀고 창문을 열고 보면 세상은 온통 빛으로 가득 찬 살아있는 자의 세계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코로 냄새 맡을 수 있으면 이것은 또 하나의 기적이다. 입으로 말 할 수 있고 씹고 맛 느낄 수 있다면,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움직일 수 있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모아둔 게 없으나 움직일 수 있고 병들어 불편하나 죽지 않고 살아있다.

가진 게 없어 나눌게 없고 베풀게 없다고 망설이거나 얼굴 붉힐게 아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를 생활의 언어로 선택해 들숨 날숨처럼 사용하자. 부드럽게 칭찬하고 긍정적 착각으로 빛을 모아 느긋하게 여유 있게 넉넉하게 당당하게 가슴 활짝 펴고 살 일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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