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 스님(조계종 고시위원장)

중국 선종 오가칠종(五家七宗) 가운데 위앙종(仰宗)은 위산 영우(山靈祐:771~853) 선사와 앙산혜적(仰山慧寂:803~887) 선사에 의해 창시된 종파다. 당나라 때 원화연간(806~820)에 영우 선사가 위산에 주석하여 종풍을 떨치다가 그의 제자 혜적 스님이 계승하여 종파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이 종파는 당말오대(唐末五代) 시기에 가장 번창하였다가 송나라 때 이르러 점차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여 마침내 임제종(臨濟宗)에 흡수되는 형국이 되었다. 위앙종은 대략 150년 정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영우 선사는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의 법을 이은 후 7년 동안 위산에 홀로 살다가 대안(大安) 스님이 백장 선사의 회상에서부터 찾아온 이래 학인들이 점차로 몰려들었다. 항상 천오백 명이 넘는 대중이 모여 황벽 선사의 문하보다 더 번성하였다. 상국(相國) 배휴(裴休)가 찾아와 법을 묻기도 했고 인근 백성들이 그의 덕화에 감복하였다. 회창법란(會昌法難) 때는 몸을 숨겨 저자에 피신해 속복을 입고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위산으로 돌아와 법을 펴고 대중을 지도했다. 영우 선사를 위산으로 돌아오게 한 데에는 배휴의 간청이 있었다.

영우 선사의 뒤를 이어 혜적 스님이 종지를 승계하여 원주앙산(袁州仰山))에 주석하면서 종풍을 크게 드날렸다. 그러나 오가(五家)의 법맥 중에서 가장 일찍 쇠퇴하여 법계는 4~5세까지 계승되다가 송나라에 와서는 소멸되고 말았다.

앙산 선사가 법을 펼 때는 남양혜충(南陽慧忠) 문하의 탐원(耽源) 스님에게 전해 받은 원상(圓相:0)을 쓰기도 했다. 그는 원상(圓相)을 써서 종지를 쉽게 이해시키려고 애를 썼다.

〈오가종지찬요(五家宗旨纂要)〉의 위앙종 가풍에 대하여 평한 말에 “위앙의 종풍은 아버지와 아들이 한 가정을 이루듯이 스승이 부르면 제자가 화답하는 방식이다. 말로도 침묵으로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밝음과 어둠이 뒤섞여 오가고 체용(體用)이 한 쌍이 되어 드러난다. 혀 없는 사람이 종지를 드러내려 하니 원상을 그려 밝히는구나”라고 하였다.

‘원상을 그려 밝힌다’한 원상에 대한 송(圓相頌)이 있다.

“옛 부처 태어나기 전 응연히 한 모양이 둥글었다.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늘 가섭이 어찌 전할 손가?”(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선가구감〉에도 위앙가풍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 부르면 제자가 화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룬 격이다. 옆구리에는 글자를 새기고 머리에는 뿔이 높이 솟아났으며, 방 안에서 학인을 점검하면 사자의 허리마저도 끊어진다. 사구(四句)도 여의고 백비(百非)도 끊어지고 한 방으로 모두 부셔버리며, 두 개의 입에 혀가 하나도 없이 아홉 구비 구슬을 잘도 꿴다. 위앙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동강난 비석은 옛길에 나뒹굴고, 무쇠소는 소실에서 잠을 잔다.”

또 ‘위산수고우(山水?牛)라는 공안이 있다. 〈전등록〉에 의하면 어느 날 위산 선사가 대중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에 산 밑에 있는 마을에 가서 한 마리 검은 암소가 되어 왼쪽 옆구리에 ‘위산의 중 아무개’라 쓰겠다. 그때 만약 위산이라 하면 암소인 것을 어찌하며, 암소라 하면 나 위산은 어찌 되는가?”

이때 앙산 선사가 절을 하고 물러났다 한다.

금세와 내세의 이세(二世)를 통하여 보면 현세의 위산이 내세의 암소가 된다는 것이다. 현세와 내세를 합쳐서 보면 위산은 암소이면서 위산이고, 암소는 위산이면서 암소다. 내세를 기준하여 말하자면 위산의 스님이라 말하자니 검은 암소이고, 검은 암소라 부르자니 일찍이 위산의 스님이었다. 사람이 소가 되었을 때 소라고 보아야 하느냐 사람이라고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를 제기한 공안이다.

〈선문염송〉에서는 이를 두고 다시 게송을 읊었다.

“산 위에서는 스님이고 산 아래에서는 소네. 털 나고 뿔 달린 무리에 섞여버렸네. 온 세상이 부처되고 조사되려 하는데 홀로 위산만 검은 암소 되었네.”

(山上山僧山下牛 被毛戴角混同流 普天成佛與作祖 獨有山作水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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