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 속 스토리텔링- 지장보살 이야기 下

 

옥천사 명부전 ‘지장탱(1744년, 마본채색)’ 부분. 지장보살의 지물인 여의주와 육환장을 잘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이 부처님께 묻습니다. “지장보살은 옛날 옛적부터 (중생구제라는) 큰 서원을 세웠는데도 어찌 제도하는 것이 끝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거듭해서 큰 서원을 세워야 하는 겁니까?”
이에 부처님은 “지장보살은 죄 많은 중생들을 자비심으로 가여워하기 때문에 (계속 밀려드는 그들을 위해) 거듭해서 서원을 세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장보살은 어떠한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할까요. 죄 많은 중생은 자신의 죄를 모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생에게는 조금은 센 처방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자신이) 한대로 받는다”라는 업보설입니다.  

업보설로 중생 경각심 일깨워
참회가 수행이 기본인 이유는
업보 인과 넘어서야 하기 때문

(지장보살은) 산목숨을 죽이는 자에게는 태어날 때마다 재앙이 있고 단명 하는 과보를 말해주고, 도둑질하는 자에게는 빈궁하여 고통 받는 과보를 말해주고, 사음하는 자에게는 비둘기·오리·원앙새로 태어나는 과보를 말해주고, 악담하는 자에게는 친족 간에 서로 이간질하며 싸우는 과보를 말해주고, 남을 헐뜯고 꾸짖는 자에게는 혀가 없거나 입에 부스럼이 생기는 과보를 말해주고, 성내는 자에게는 얼굴이 더럽고 추악한 풍창이 생기는 과보를 말해주고, 탐내고 인색한 자에게는 바라는 소원이 뜻대로 되지 않는 과보를 말해주고, 음식을 절도 없이 먹는 자에게는 배고프고 목마르며 목병이 생기는 과보를 말해준다. (중략) 부모에게 악독하게 하는 자에게는 다시 바꾸어 태어나 매 맞는 과보를, 절의 물건을 훔치거나 함부로 쓰는 자에게는 억겁을 지옥에서 맴도는 과보를, 재물을 옳지 않게 쓰는 자에게는 구하는 바가 막혀 더 이상 생기지 않는 과보를, 자만심이 높은 자는 하천하고 미천한 종이 되는 과보를 말해준다.
〈지장보살본원경〉 ‘염부제 중생들이 받는 업보’ 中

자신이 다른 생명을 해치면 다음 생에서는 본인의 생명이 짧아지고, 도둑질해서 남의 것을 훔치면 가난하게 태어나 고통을 받고, 악담으로 남을 못살게 굴면 스스로가 이간질을 당하여 다투게 되고, 욕심이 많고 인색하여 남이 원하는 대로 절대 해주는 일이 없으면 다음 생에는 거꾸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으며, 표독한 자만심으로 사람을 무시하면 다음 생에는 무시당하는 노비의 입장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
소위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을, 불교에서는 자신의 ‘업보’라고 말합니다. 〈지장경〉에는 이렇게 간략히 언급되어 있지만, 〈지장십륜경〉의 경우에는 나라님과 관리인, 승단과 속가 등에서 발생하는 온갖 다양하고도 은밀한 악업들이 적나라하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해탈장엄론(감뽀빠 지음)〉의 ‘업과 그 과보에 대한 명상 수행’에는 불선업(不善業)을 크게 10가지로 분류해 놓았는데, 이는 살생·도둑질·성적인 부정행위·거짓말·이간질하는 말·거친말(욕설 등)·한담(잡담)·탐욕·유해한 생각·잘못된 견해(사견邪見)에 해당합니다.

이 같은 업을 저지르면 그 업의 에너지가 약 3가지로 전개됩니다. 첫째는 이숙과(異熟果)로, 자신이 한 행위가 숙성되어 또 다른 형태의 결과로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등류과(等流果)로, 저지른 원인과 유사한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는 앞서 〈지장경〉에서 언급한 대로 ‘자신이 행한 대로 받는다’에 속합니다. 즉, 가해자는 피해자가 됩니다. 셋째는 증상과(增上果)인데, 악업이 진행된 결과로서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둑질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힘으로 강탈한 탈취, 아무도 모르게 남의 것을 훔치는 은밀한 탈취, 물건의 길이나 무게 등을 속인 기만적 탈취 등으로 나뉩니다. 도둑질의 업은 3가지 과보로 자신에게 돌아오는데, 이숙과의 과보를 받으면 아귀로 태어나고, 등류과의 과보를 받으면 인간계에 태어나더라도 가난하여 고통을 받고, 증상과의 과보를 받으면 유달리 서리와 우박이 많은 곳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갖가지 업에 따라 다음 생에, 육도(六道: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인) 중에 어디에 떨어지는지, 또 인간계에 태어나더라도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는지, 어떤 얼굴 모양새와 성품을 갖게 되고,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되는지, 또 어떤 대우를 받게 되는지 등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에 근거하는데, 유식(唯識)에서는 4연(緣)을 말합니다. 즉, 원인되는 인연(因緣), 그 대상이 되는 소연연(所緣緣), 부단히 흐르며 상속되는 등무간연(等無間緣), 일체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는 증상연(增上緣)입니다.

대비심(大悲心)을 일으킨 뒤에 다시 저 중생들을 관찰하니/ 여섯 갈래 속에서 윤회하면서/ 나고 죽음의 끝이 없네/ 그것은 거짓이고 견고하지 못하여 마치 파초 꿈 환영 같네/ 이어 한밤중에/ 깨끗한 하늘 눈(天眼)을 잇따라 얻어/ 일체 중생을 관찰하기를 거울 속 모양 보는 듯하니/ 중생의 삶과 나고 죽음, 귀천과 부귀는/ 청정업(淸淨業)과 청정하지 않은 업(不淨業) 그것에 따라 고통과 즐거움(苦樂)의 과보를 받네.
나쁜 업(惡業)을 지은 이 관찰할 때 반드시 나쁜 갈래(惡趣)에 태어나고 좋은 업(善業)을 닦아서 익힌 이 인간이나 천상(人天)에 태어난다. 만일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은 한량없는 갖가지 고통 받나니 (중략) 이런 지극한 고초를 받지만 업행(業行)은 그를 죽게 하지 않는다.
 -〈붓다차리타(佛所行讚)〉 ‘부처가되다(阿惟三菩提品)’ 제14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중생 세계를 관찰하니, 그 운영의 실체는 업(業)이라는 것을 보시게 됩니다. 자신이 지은 업의 에너지가 그 에너지의 형태 그대로 유전(流轉)하고 있었습니다.

業대로 체험하는 지옥 풍경
연기의 인과적 작용을 구체적인 업보의 형식으로 써놓은 〈지장경〉을 독송하면,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참회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이러한 일이 내게 왜 생기는 지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원인이 되는 것이 세세생생 전에라도 분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과법-업 사상-참회기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참회가 왜 항상 수행의 시작이 되는지 이해가 가게 됩니다.

지장보살은 업의 과보를 말한 뒤, 그 업대로 떨어지게 되는 무시무시한 지옥을 설함으로서 중생들을 제도합니다.

그 종류를 보면, 고통이 끊이지 않아 한 순간도 쉴 수가 없는 무간지옥, 비명소리가 끊임없는 규환지옥, 구리물에 펄펄 끓는 확탕(또는 화탕)지옥, 칼날이 무수하게 거꾸로 박혀 있는 도산지옥, 얼음 속 추위의 한빙지옥, 혀를 뽑는 발설지옥, 창으로 찌르는 통창지옥, 목 자르는 도수지옥, 다리 태우는 소각지옥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지옥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그린 것이 ‘지장시왕도’라는 장르의 불화입니다.


알아두면 좋은 佛美 상식
지장보살의 지물 ‘여의주·육환장’

미국 스미소니언갤러리 소장 ‘지장보살도’의 여의주 부분.

지장보살은 여의주와 육환장을 지물(持物)로 들고 있다. 육환장은 부처님에게서 직접 수여받은 것으로 어느 누구도 열지 못한다는 지옥문을 열수 있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 다른 한 손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는데 이것으로는 지혜의 빛을 비추어 무명을 타파한다. 그래서 지옥 속의 중생을 제도한다.

〈지장경〉에는 “자비스러운 인因으로 선근을 쌓아/ 맹세코 중생을 구제해내는 지장보살이/ 손 가운데 가진 금석주장을 떨치면/ 지옥문이 스스로 열리고/ 손바닥 위에 밝은 구슬의 광명은/ 널리 대천세계를 비춘다”라고 쓰여 있다.

금석주장을 줄여서 석장이라고도 하는데, 여섯 개의 고리(六環)가 지팡이 꼭대기에 달려있는 것을 육환장이라 한다. 이 여섯 개의 고리는 지옥·아귀·축생·수라·사람·천의 육도(六道)를 상징한다. 지장보살의 지물인 육환장에는 ‘육도윤회에 떨어진 뭇 중생들을 모두 남김없이 구제 하겠다’는 크나큰 의지와 자비가 담겨있다.

여의주는 불교에서 ‘궁극의 깨달음’을 나타내는 도상이다. “하나하나의 여의주로부터 온갖 보배가 비 오듯 하고/ 또 온갖 광명이 비추는데/ 그 빛으로 인해 한 하나의 유정들이 모두 시방의 갠지스 강 모래알만큼 많은 부처님 세계를 보았다.” 여의주는 불성(佛性)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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