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설법도 ‘무주상보시’ 실천하길

깨달음의 수행자답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마음 중심의 종교이자 사람이 주인이 되는 종교이다. 불교와 불교의 신앙은 불교를 위해 신앙을 위해 사람이나 다른 생명이 희생되길 바라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살아가듯 넉넉하고 당당하게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 여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버팀목과 디딤돌,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이 불교이자 신앙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신앙은 사닥다리에 올라가듯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바뀌어 마음이 열리도록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여덟 가지길(八正道)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상생활의 덕목으로 여섯 가지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길(六波羅密)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불교의 현 주소는 바른 불교, 바른 신앙과는 상당한 거리감을 느낄 수 있게 지식층들의 외면 아닌 외면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는 가르침이 경전 중심에서 이탈해 목탁 불교로 기울어져 거래하는 신앙으로 변절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 담긴 불교가 순수불교라면 사찰경제가 우선인 목탁불교가 그 넓이와 깊이를 더해가며 망가지는 잡식(雜食)신앙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천도의식인 49재 경우 한 두 시간의 종교의식에 5백만 원, 1천만 원의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것인지 냉철한 자가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개선 되어야할 문제이다. 불교TV와 방송에서도 사찰 운영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광고성 실력 없는 출연자로 하여금 불교의 가르침을 어둡게 하는 부끄러운 형태는 과감히 벗어나야한다.

출가(出家) 수행하는 스님들이 해마다 생일상을 신도들로부터 받고 있다면 이는 당당하지도 떳떳하지도 못한 사라져야할 풍습이다. 거기다가 승려의 장례식장에서 한 판 벌리듯 조의금을 접수하는 풍경은 세속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이겠다. 승려의 장례는 간소화 할수록 아름답다. 상여와 만장이 불교문화가 아닐진데 수행승의 가는 모습도 검소하게 단출하게 적멸(寂滅)의 마무리를 개운하게 교훈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옳은 것이다.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승려의 49재에 이르는 절차가 이 사찰, 저 사찰로 옮겨 다니며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모습은 떠난 자의 뒷모습을 번거롭게 할 뿐이다. 거기다가 덕 높으신 스님일 경우 앞 다투듯 기념관을 만들어 가신 스님을 추모하고 있으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신 고인의 참 바람은 아닐 터이다. 출가 수행승 이라면 누구나 기본에 충실하고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철저함이 갖추어져야 한다.

주지 진산식도 사라져 가야할 부끄러운 전통임을 밝혀둔다. 출가할 당시의 초발심(初發心)을 잃지 않도록 채찍질하여 흔들리고 헐떡일 때마다 승려의 기본 덕목에서 이탈함이 없도록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게으름을 병으로 알아 학문 수행과 심성 수행으로 기본을 다지고 열린 불교의 열린 주인공답게 드러내고 감출 것 없이 개운한 수행승으로 살 일이다.

육바라밀의 첫째 실천 덕목이 보시(布施)이다. 보시 중에서도 법보시(法布施)가 으뜸임은 누구나 익히 아는 상식이다. 제발이지 상식이 통할 수 있게 승려의 목탁도 설법도 무주상(無住相)보시를 실천하는 수행의 일부가 되길 바랄 뿐이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울려 퍼져야한다. 때와 곳도 가리지 않고 주지스님의 설법 뒤에 슬그머니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는 권선문이나 시주를 강요하는 듯 한 영험설화 따위를 앞세우는 구걸하는 듯 한 부끄러운 행위는 마땅히 사라져야한다.

진정한 법당은 내가 머무는 가정이며 영험 있는 부처는 내 가족이며 이웃임을 일깨워 줘야한다.

불교에서는 운명론을 거부한다. 신(神)의 존재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고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네 생활 주변에 널려있고 드러나 있는 것이다. 불교는 어제를 위한 종교도 내일을 위한 종교도 아닌 오늘의 종교인 것이다. 불교의 중도사상(中道思想)에서 일깨워 주고 있듯 내가 어느 곳에 있든 동, 서, 남, 북의 중앙에 있는 것이며 내가 곧 세상의 중심에 선 오늘의 주인공임을 두고두고 잊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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