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장곡사 가는 길

국내 최장 현수교인 천장호 출렁다리를 건너는 도반들의 모습.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한 인공저수지와 칠갑산의 조화를 보며 부처님이 말한 자연의 섭리가 저절로 생각났다.

 숲의 생태계는
나무와 나무의 어울림으로
우리의 사회는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으로

“구경꾼 놈들의 간덩이를 덜컹덜컹 놀라게 해 주란 말야. 재주를 좀 부려, 재주를.”

어느 봄날, 출렁다리를 건널 때 이청준의 단편소설 ‘줄’이 생각났다. 그중 서커스 단장이 줄광대 허 노인을 나무라는 대사를 나는 중얼거렸다. 천장호 출렁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동양에서도 둘째가는 현수교라고 한다. 누구의 발상인지 다리 중간쯤에 구멍이 숭숭 뚫린 철망을 깔아 천장호를 아찔하게 내려다보게 했다. 앞서가던 남성이 손잡이 줄을 흔들어 뒤따르던 여성의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등산객들이 긴 다리를 건널 때 흔히 하는 장난이지만 늘 웃음을 유발한다.

1979년 담수를 시작한 천장호는 갈수기에도 바닥을 드러내는 일 없이 사시사철 잔잔한 물결을 이룬다.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인공으로 조성한 저수지가 칠갑산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 것이었다. 자연스레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물은 불과 공기, 바람과 더불어 고대로부터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4가지 요소의 하나이다. 천장호가 생기면서 천장호의 환경과 그 주변에 살던 사람의 생활이 개선되었다는 건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본보기지만 그러려면 사람과 사람이 먼저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그래야 하는 까닭을 부처의 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사카족과 콜리야족의 물싸움이다. 로히니강을 사이에 둔 사카족과 콜리야족 땅에 가뭄이 든 건 어느 여름이었다. 농부들은 물 한 바가지라도 더 대려고 새벽부터 물을 날랐지만 논바닥은 타들어 가기만 했다.

바닥을 드러낸 로히니강처럼 두 부족의 오랜 친교와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물을 서로 양보하라며 싸웠다. 언쟁으로 시작된 싸움은 주먹질로 변했고 급기야 두 부족이 전쟁을 벌일 태세로 급변했다. 칼과 창을 무기고에서 꺼냈고, 기마 부대와 코끼리 부대까지 동원했다. 

사카족과 콜리야족은 옥카카왕의 후손으로, 두 부족의 시조는 각각 옥카카의 왕자와 공주였다. 따지고 보면 친족이자 자매 사이라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도 서로 자기 영역을 지킬 수 있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해 창칼과 활을 겨누고, 술 취한 코끼리들과 재갈을 물린 말들이 금세라도 대열에서 뛰쳐나가려 앞발을 높이 쳐들었을 때였다. 부처가 강둑을 따라 전쟁터로 다가오고 있었다. 드높던 아우성과 먼지가 한순간 잦아들었다. 부처는 창칼을 내려 놓고 엎드린 양쪽 군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강물과 사람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합니까?”

그야 사람이 훨씬 소중하다고 모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도 물을 위해 사람의 목숨을 버리겠다고요? 로히니 강바닥을 피로 채우렵니까?”

부처는 손을 들어 먼 히말라야를 가리켰다.

“저 히말라야의 숲은 거센 태풍이 불어도 온전합니다. 수많은 나무와 덤불과 잡초가 서로 뒤엉켰기에 무엇 하나 다치지 않지요. 하지만 넓은 들판에 홀로 선 나무를 보십시오. 지금은 무성한 잎을 자랑하지만 태풍이 휩쓸면  뿌리째 뽑히고 맙니다.”

부처는 자연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섭리를 가르쳤다. 사람과 사람이 조화를 이뤄야만 사람과 자연이 또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관계이며,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라야만 로히니 강의 메마른 바닥에도 물이 흐를 수 있는 관계였다. 모든 관계가 평화로이 공존하기를 부처는 소망한 것이었다.  
다리를 건너와서 돌아보니 과연 최장의 현수교답게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이 센 햇빛에 잠겨 있었다. 천장호 수면 위로 기슭의 언덕이며 정자가 데칼코마니를 이루었다. 뿌리째 뽑혀서 떠내려 온 갈참나무 하나가 호수에 머리를 풀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부처가 말한 자연의 어떤 섭리인 양 그리 흉해 보이지 않았다.

장곡사로 가는 칠갑산 오솔길.

천장호는 칠갑산에 올라서도 한동안 시야를 떠나지 않았다. 철계단을 밟아 오르는데 알싸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멀리서 천장호를 내려다보니 물가에서 화르르 타오르는 꽃들이 초파일에 절을 둘러싼 연등 같았다. 산 아래뿐이 아니었다. 산 위에는 벌써 꽃이 피고 지고, 다시 피면서 봄이 행진하고 있었다. 조팝나무 꽃과 수수꽃다리가 파르르 바람에 흔들리고, 생강나무와 산수유나무는 져버린 꽃 대신 잎이 흔들렸다. 5월에 핀다는 병꽃나무와 고광나무도 미리 흔들리고 있었다. 꽃 피는 자리가 수시로 바뀐다. 전선 위에 앉아있던 새들이 공중에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으면서 자리를 바꾸는 모양새다. 봄은 공중재편성의 시기이다. 내가 칠갑산에 갔을 때는 개나리꽃에서 진달래꽃으로 재편성되는 시기였다. 

칠갑산은 아라비아숫자 7을 화두로 품은 산이다. 마야 왕비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부처는 일곱 걸음을 걸었다.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후에도 부처는 일곱이란 숫자와 인연을 맺는다. 하루에 한 번씩 자리를 바꿔가며 보리수 곁에 있는 나무들 아래 앉았는데 모두 일곱 나무였다. 그때 이미 깨달음의 기쁨을 여러 나무, 여러 사람에게 나눠주기를 무의식이 소망했던 것 같다. 부처와 깨달음의 기쁨을 함께했던 나무는 보리수 말고도, 라자야타나나무, 리파나나무, 문린나무, 아유타라니구나무, 반얀나무, 가리륵나무이다.

얼마 전 지하철 광고에선가, 어울림이란 글자의 맨 끝에 한글 대신 林자를 써서 어울林으로 표기한 글자를 보았다. 숲이라는 생태계를 기막히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에도 사카족과 콜리야족이 있어 그 옛날 부처가 그리했듯이 숲의 교훈을 통해 국민 화합을 강조하려는 의도 같았다.

칠갑산 정상561m에 오르는 숲길에도 기막힌 어울림(林)이 있었다. 바로 연리지와 연리근의 나무 군락지이다. 우연히 한둘 정도면 모르겠으되, 수십 그루 이상이 한군데 모여 있는 건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정상을 지나 S자로 구부러진 능선길을 몇 구비 돌면 장곡사(長谷寺)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나온다. 키 큰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찬 숲길을 지나자 상대웅전과 하대웅전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보였다.

장곡사의 전각과 불상들을 보자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을 굴리던 부처가 생각났다.

“에히 비쿠!”

다섯 비구에게 차례로 구족계를 내려주고서 부처는 말했다.

흐드러지게 핀 황매화와 장곡사.

“비구여, 물질은 영원불변한 내가 아닌 까닭에 병들고, 물질은 자유자재한 내가 아닌 까닭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파괴되는 본성을 가진 그것들을 두고 과연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부처가 일찍이 장곡사에 다녀갔었나? 장곡사의 전각과 불상들엔 나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형셩색색 연등이 걸린 장곡사 초입의 모습.
걷는길 : 마치고개(천장리) - 천장호 - 출렁다리 - 칠갑산 정상 - 삼형제봉 갈림길 - 장곡사 상대웅전, 하대웅전 - 칠갑산 도립공원 주차장
거리와 시간 : 11km 정도, 4시간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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