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에 다녀와서

부처님오신날 며칠 전에 석남사에 다녀왔다. 석남사는 내가 절수행에 대한 글을 쓰는 데 계기가 되어준 절로 마치 친정처럼 푸근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석남사와의 인연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후학들을 이끌며, 비구니승가의 출가정신을 확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석남사가 종립 비구니선원이 되는 초석을 세운 인홍 스님의 일대기를 쓰면서 부터다.

인홍 스님 일대기 쓰며

석남사 대중과 선연 쌓아

24시간 조편성해 절수행

새로운 발심의 원동력

10여 년 전, 인홍 스님의 제자 스님들을 뵙기 위해 처음 석남사를 방문했을 때는 지금처럼 초록빛이 싱그러운 5월이었다. 인홍 스님의 제자 스님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에 대해 열과 성의를 다해 은사와 함께 했던 세월을 증언했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며칠동안 아름다운 이야기에 흠뻑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 들은 많은 이야기들이 마음 속에 간직돼 있어서인지 석남사에 갈 때마다 마치 내가 살았던 곳처럼 친근함이 느껴진다. 특히 그때 들은 절수행에 관한 전설같은 이야기들은 108배 수행에 대해 글을 쓰게 되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석남사에 저녁 나절에 도착하니 선원장이신 법희 스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스님은 1950년대 후반, 스승인 인홍 스님을 따라 석남사에 들어오셔서 어느덧 여든여덟의 노스님이 되셨다. 처음 뵈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화신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분이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단아한 모습을 간직하고 계셨다. 스님은 성철 스님께 화두를 받기 위해 수만 배의 절을 했다. 당시 성철 스님은 화두를 받으러 온 스님들에게 반드시 최소 3만 배를 시켰다고 한다. 방석을 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법당 마룻바닥에서 매일 절을 한 탓에 무릎이 까지고 피가 철철 흘렀다. 하지만 신심이 북받쳐 그만둘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열흘 동안 매일 3천배씩 3만배를 하고 성철 스님께 화두를 받고 돌아올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고 하시니, 그렇듯 빛나는 초발심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날 스승의 뒤를 이어 석남사를 이끌고 계신 것이다.

저녁예불을 드리러 가는 길에 도문 스님을 뵈었다. 가사장삼을 단정히 수하고 천천히 법당으로 걸어가시는 모습에 위의가 서려 있었다. 스님 역시 인홍 스님의 제자로 석남사에서 평생을 정진한 분이다. 여든 가까이 되셨을 텐데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예불을 드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예불이 끝난 뒤 108배를 하고 잠시 앉아 있으려니, 법당에 깃든 석남사 스님들의 절수행에 관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인홍 스님이 오십대 후반의 나이에 심한 췌장염으로 생사를 헤맬 때, 온 대중스님들이 나서서 네 사람씩 조를 짜 24시간 절을 하며 스승을 살려냈다. 108배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을 때 가장 먼저 쓰고 싶었던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 일화는 나중에 ‘왜 21일 기도를 하는가’는 주제로 자세히 쓸 생각이다. 혹시 인생의 전환점을 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분이 있다면 석남사 법당을 찾아 아직도 그 절절했던 기가 서려있는 법당에서 절을 해보시기 바란다.

법당을 나오다 前 주지 도수 스님의 전화를 받았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한 공영방송에서 3천배와 만배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영한다고 하니 함께 보자는 연락이었다. 절수행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데다 이번 석남사를 방문한 목적도 그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고 계신 스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뜻밖에 횡재를 한 기분으로 스님과 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스님도 초발심시절에 절을 하며 신심을 세웠다고 하며 관심을 보이셨다.

절수행의 고수들이 모이는 해인사 백련암을 무대로 절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시누이 남편이 교통사고로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에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절을 시작했다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깊이 공감되었다.

그렇다. 살면서 예기치 않게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 삶을 덮치곤 하던가. 그럴 때 108배를 하면 깊은 안정감을 얻게 되어 불안감이 사라진다. 남을 위한 기도, 그것도 때때로 1만배를 하면서 철저히 남을 위해 기도하는 그녀야말로 진정한 보살 같아 보였다.

몸이 몹시 성치 않은 자식을 돌볼 수가 없어 시설에 맡겨 키울 수밖에 없었던 한 어머니가 108배를 통해 안심을 얻은 이야기도 감동적이었다.

자식을 자기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은 부모로서는 생살을 찢는 아픔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절을 하면서 무한히 참회하고 자식이 살아 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을 터인데, 108배는 그렇게 겸허하게 인연에 수순하게 하는 지혜를 갖게 한다.

다음날, 새벽예불을 마치고 3백배를 한 뒤 심검당에 올라갔다. 그곳은 40여 년 전에 인홍 스님이 선후배 스님들과 한국비구니계 최초로 3년 결사를 한 곳이다. 스무 분의 스님들이 3년 동안 절 문밖을 나가지 않고 지혜의 검을 찾기 위해 생사를 걸고 정진했던 곳이다. 당시 대중을 이끌며 정진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인홍 스님의 작은 방 벽에 붙여놓았다는 글이 생각났다.

“누워 편안할 때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받을 자신을 생각하라.”

이순의 나이를 넘기고도 쉽고 편하게 사는 길을 철저히 경계하며 정진의 고삐를 놓지 않았던 스님의 처절한 노력을 생각하면 심검당에 올 때마다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3년 결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철저한 수행으로 인해 절 전체에 얼마나 긴장감이 감돌았는지 결사에 참석하지 못한 스님들 또한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듯 화두만 마음에 있었던 스님들이 새벽예불 때마다 한 수행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3백배가 그것이다. 일체 중생을 대신해 참회하고, 정진하는 데 장애 없기를 기도하며 절을 한 것이다. 석남사 법당에서 옥류동 골짜기를 따라 10여 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는 심검당엔 지금도 안거철이 되면 선객 스님들이 모여 힘차게 정진하고 있다.

석남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면을 빌려 절수행으로 심각한 병고를 이겨내고 올곧게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인홍 스님의 손상좌 현각 스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현각 스님은 30대 중반에 늑막결핵을 앓고 있어서 석남사 3년 결사에 동참하지 못했다. 결핵을 너무 오래 방치해 두어서 균이 늑막으로 옮겨가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에 지장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방사선 사진을 찍어보니 폐 한쪽에 물이 차서 사진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실에 누워 있자니, 환자복을 입고 병원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다. 죽어도 절에 들어가서 죽겠다고 생각하고 석남사로 다시 들어갔다.

수술을 마다하고 병원에서 나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석남사 구석진 뒷방에 있으면서 스님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견뎠다. 그러다 공부하는 다른 스님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은사 스님이 기도하고 있는 해인사로 갔다. 은사 스님 곁에 있다가 죽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선배 스님 한 분이 기왕에 죽을 거라면 성철 스님에게 가서 인사나 드리라고 했다.

선배 스님 세 사람이 아파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스님을 데리고 성철 스님에게로 갔다. 고열로 인해 콧물이 줄줄 흐르고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이어서 가다가 드러눕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면서 몇 시간을 걸려 파계사 성전암에 도착했다. 성철 스님이 다짜고짜 살고 싶으면 3000배를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서너 번만 절을 하면 그대로 쓰러져 죽을 것처럼 몸이 아팠지만, 이렇게 정리하고 절을 하기 시작했다.

“부처님 밥을 얻어 먹은 세월이 얼마인데 이렇게 그냥 죽을 수야 없지 않은가. 부처님 멱살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 죽자. 절을 죽더라도 한 번 해보자.”

첫 날 아침 8시, 해인사 극락전에 들어가 은사 스님을 따라 절을 했다. 절을 하는데 천장이 땅이 되고 땅이 다시 천장이 되는 것처럼 어지러워 정신이 혼미했다. 너무 아파서 제발 죽었으면 하고 엎드리면 고개가 들리고, 다시 죽어야지 하고 엎드리면 또 고개가 들려졌다. 그렇게 기적처럼 첫날 천 배를 했다. 그러고 나자 못난 자신에게 속아서 수십 년 동안 허송세월을 했다는 분한 마음이 들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한 채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3000배를 했다.

그러는 동안 힘이 없어서 산을 하다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던 엉덩이가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처럼 가뿐하게 올라갔다. 먹던 약을 모두 끊고 7일 절을 하고 나서 7일 쉬면서 49일 동안 절을 하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3000배를 했다. 그동안 무릎은 다 벗겨지고 피가 흘렀지만 몸은 점점 가벼워지고 정신은 명료해졌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절을 하고 목숨을 구하게 됐다. 현각 스님이 한 말씀을 전한다.

“바늘 끝 만한 일도 인과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의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절 기도를 해서 나은 것은 전생에 내가 지은 죄를 참회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108배 100일 기도를 끝내고 현각 스님처럼 건강해지기를 기도한다. 스님은 여든 살이 넘으신 지금도 만나는 이들에게 스님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전하며 절수행을 권하고 계신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