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마음 밝으면 태양계도 여러분이지 딴 게 아니다

내면의 소리에 대해서

질문 한마음요전 수행편에 보면 “처음 공부하는 단계에서는 내면의 소리가 볼썽사나운 일을 하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 몸뚱이를 인형 놀리듯 하지 말고 마음으로 돌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안에서 나오는 대로 행동한다면 정신세계에 끄달려 사는 것이니 마치 그 이전 물질세계에 끄달려 사는 것과 같다. 고로 중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하셨는데 그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여쭙고자 합니다.

답변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죠. 내가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는데 큰 구렁이가 똥그랗게 틀고 있더니 내가 가니깐 별안간에 고개를 반짝 들거든요. 반짝 들더니 얼마 있다가 길게 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느냐? ‘오! 똥그랗게 있었던 건 원이고, 머리를 들었던 건 백(白)이구나. 허허. 그러니 한 일(一) 자로 기다랗게 있으면서 하나로 뭉쳐졌던 것은 이건 일심(一心)에서 모든 게 나가고 들어온다는 거구나, 모든 게.’ 그렇게 생각을 하고선 떡 돌아서니깐 맑은 물이 있는데 먹고 싶단 말입니다. 먹으려고 딱 가니까 똥이 마려워요. 거기다 똥을 누라는 겁니다. 그 맑은 데다가, 글쎄. 오고 가는 사람들이 먹는 물에다가.

여러분은 만약에 내 속의 은사가, 내 스승이, 마음에서 ‘저기다 똥을 눠라.’ 이랬다면은 노예처럼 거기다 똥을 누겠습니까? 단지 똥을 누라는 겁니까, 그게? 여러분은 공부하면서 내면의 스승이 ‘똥을 누라’ 이러면 똥을 누라는 줄로만 알아요. 그 뜻을 새겨 봐라 이겁니다. 그 뒷면을 봐라 이겁니다. 네? 만약에 뜻을 모른 채 그 말 그대로만 알고서 행한다면 그냥 노예가 돼 버리는 거죠. 달리 귀신인가요? 그래서 귀신이지. 내가 귀신 짓을 안 하면 귀신이 어딨습니까? 그래서 생각을 할 때 그게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남이 오다 가다 떠 먹는 물, 깨끗한 물에 똥을 누라니, 글쎄.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래서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까, 똥끝도 딱 들어갔어, 인제는. 하하하. 똥끝도 딱 들어가고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러고 있다가 생각을 하니 그게 내 뜻을 보느라고 그랬다는 생각이 났어요. 거기다 정말 시키는 대로 똥을 누느냐, 네 권도(權道)로써 네가 해결을 하느냐 이거죠, 바로. 그래서 유(有) 무(無)를 갖추어야 된다는 거죠. 현실 세상을 무시해도 안 되고 무의 세상을 무시해도 안 됩니다. 내 마음을 무시해도 안 되고, 내 생명을 무시해도 안 되고, 내 몸뚱이를 무시해도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껄껄 웃고서 똥끝도 들어갔겠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물맛 참 좋구나.” 이럭하고선 갔다니까요.

여러분은 ‘아하! 나를 가르치느라고 시공이 없는 법, 권도법에 의해서, 자유인을 만들기 위해 성장시키는 과정이구나.’ 하는 걸 믿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놓고 이래야지, 이거는 여기서 시키는 대로 ‘저기서 호박 따 오너라’ 하면 호박 따 오고, ‘저기서 참외 따 오너라’ 그러면 참외 따오고, ‘콩 서리 해라’ 하면 콩서리 하고 그런다면 그거는 귀신 짓이다 이겁니다. 자기가 발로가 되어서도 어려워요. 그게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길잡이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죠. 먼저 길을 걸어갔다 온 사람한테 길을 인도를 받아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리고 또 예전에 그때는 아무거나 먹고 그런 때니까, 풀을 뜯어먹고 입이 써서 힘들곤 했는데 말입니다, 소나무도 위에 난 가지를 똑똑 딸 수가 있나요? 내 목 따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밑에 나온 그냥 조그만 가지에게 ‘나 좀 도와줘!’ 그러고 따 가지고선 그걸 먹다 보니깐 떫고 시어서 그냥 입이 하나가 잔뜩 된 거죠. 아, 그래 물을 찾아서 이렇게 가다 보니까 옹당물이 있는데, 그게 맑으니까 내 얼굴도 비치는 거예요. 그런데 바가지도 없고 그래서 손으로 이렇게 뜨려니까 아, 난데없이 내 스승이 말입니다, 내면의 내 스승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야! 네 얼굴이 아니라 네 삼촌 얼굴이다.’ 이러거든요. 허허허. 그래서 ‘삼촌?’ 그러고 이렇게 보니까 보는 순간에 또 금방 화해서 ‘어이구, 얘! 네 아버지 얼굴인데.’ 이러고 또 ‘아이구, 네 자식 얼굴이야. 아니, 네 며느리 얼굴인데.’ 이러고 아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라. 그때는 그 소리에 그냥 멍멍해진 거예요.

물을 먹으려고 그러다가 물을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입이 시고 딱 그냥 한 입 된 게 그게 어디로 갔는지 그것도 잊은 채 그냥 멍멍히 생각을 하다가, 아무 생각도 없이 있다가 아휴,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렇게 그냥 빠르게 돌아간다는 게 그게 있을 수가 없잖아요. ‘아이고, 아빠 당신이 알아서 해!’ 그러곤 그냥 탁 놓고는 또 어디쯤 가다 보니까 ‘만사만생이 다 그냥 있는 게 없고, 산천초목의 천차만별 그 초목들도 그냥 그대로 있는 게 없다’ 이거야. 거기에서 그때 그게 생각 난 거야. (손뼉을 한 번 치시며) ‘아이쿠, 이렇구나.’ 그래서 나는 내가 나한테 배운 거지마는 내가 없더라고요. 내가 없어. 나도 없고 아빠도 없고. 왜 없느냐? 이렇게 따지니까 또 이런 생각이 납니다. 아하! 예전에 말이에요, 야, 이렇게 묘지가 (법상 위에 있는 두 개의 물컵을 가리키시면서) 있는데 “이 묘지는 아비의 묘지고 이거는 자식의 묘지인데 이 자식이 이리로 오면 아비가 되고, 요 아비가 자식한테로 가면 자식이 된다.” 이겁니다. 아, 그 생각이 문득 나는 거예요.

아, 그러니 체가 없는 마음이 쉴 사이 없이 화해서 바뀌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이 미국에서 “스님, 나 이렇게 이렇게 애를 잃어버렸는데 지금 죽겠습니다. 어떡합니까?” 하고 울고 야단들을 할 때 “알았어요.” 할 수 있는 그 대답이 나오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떡하면 좋아. 왜 그렇게 한만히 뒀어? 뭐, 어쨌어?” 하며 서로 뛸 겁니다. 그러나 말이 필요 없거든요. 여러분도 나하고 둘이 아니게 심부름꾼이자 부처자, 법신이자 화신이자, 바로 지신이자 용신이자, 관세음보살이자 지장이자, 칠성이자 독성이자 아, 부처이자 모두가 아니 되는 게 없어요. 이렇게만 해 놔도 좀 감응이 됩니까?

그러니 실질적으로 이거를 하나하나 체험을 하십시오. 하나하나 탑을 쌓아 올라가는 게 점수(漸修)라 하면, 다 쌓고 봉오라지 탁 올려놓는 게 돈오(頓悟)예요. 그러니 점수와 돈오는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니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다. 돈오다 점수다 이 언어가 붙지 않는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저 모든 걸 지켜보고 관하라 이랬죠? 그러면 “뭐 지킬 게 있느냐?” 이러고 “지키는 놈은 어떤 거냐?” 이래요, 또. 그러는데 그대로 자기가 ‘거기서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 그러고 거기 맡겨 놓으면, 맡기는 놈도 그놈이요, 지키는 놈도 그놈이다 이겁니다. 지켜봐라 이거예요. 그러면 거기에서 또 감응이 되고 실험이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체험을 거기서 하게 되고, 또 어떻게 닥쳐오면 갖다 놓고 또 하다 보면 체험이 되고 또 체험이 되고…. 그게 바로 하나하나 쌓아서 탑 올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물리가 터지고, 그렇게 하다 보면 홀연히 자기를 자기가 알게 되고, 그럭하다 보면 둘 아닌 도리를 알게 되고, 그렇게 하다 보면 바로 둘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청정한 거는 깨끗한 게 청정한 게 아니라

구정물, 더러운 물, 고름물, 핏물

다 한데 합치는 것이 청정이다.

 

자성이 무엇인지요

질문 자성(自性) 또는 본성(本性)이라는 말을 도반들끼리 많이 쓰면서도 그 진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오늘도 이렇게 밝았으니 저 태양빛이 지금 들어옵니다. 여러분은 어저께 밤도 알고 있고, 오늘 태양빛이 쪼여서 날이 밝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 또 오늘은 아주 구름 한 점 없이 태양이 저렇게 뜨겁게 비추는구나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혀를 놀려서 뻔드르르하게 하는 말은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뛰면서, 뛰면서 생각하면서 집어 먹고, 집어 먹으면서 뛰고 이러는 세대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뜻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물질로서의 과학도 문화도 모든 게 발전이 돼서 우리 머리는 그때와 지금이 다릅니다. 그러니 오늘 요 대낮에 잠시 잠깐 빛이 비치는 걸 여러분이 아시죠. 어저께 밤에 또 주무셨죠. 매사 다 건건이 아시면서도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그 아시고 계신 그 자체가 자성(自性)입니다. 그래도 모르신다고 하시겠습니까? 불성이 어딨느냐고, 내놔보라고 막 이러겠습니까?

이 점에 뒷받침이 될 얘기가 있습니다. 예전에 오조 홍인 선사가 육조 스님이 행자일 때 삼경(三更)에 들라고 해서 금강경을 설하시니 그 끄트머리에 대답한 육조 스님의 말이 있습니다, 네 가지 종류. 여러분이 나보다도 아마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뜻이 있습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말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래! “자성은 본래 생멸(生滅)이 없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까?” 그 본래가 참 중요합니다. “자성이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자성은 움죽거림이 없이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이겁니다.

아마 내가 틀렸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뜻은 똑같습니다. 예전에 들은 얘깁니다마는 그걸 듣고서 참…, 여러분도 모두 감지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직껏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알고 있는 자성이 누군 줄을 모르신다면 어떡하겠습니까? 본래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들이고 내는데 말입니다. 손색이 없고 여여하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죠. “잘못되고 잘된 걸 다 놔라” 이랬습니다. “잘못되고 잘되고, 좋고 나쁜 걸, 아는 거는 다 놔라.” 잘못되는 것도 나오고 잘되는 것도 나오고, 잘하는 것도 나오고 못하는 것도 나오고, 높은 것도 나오고 얕은 것도 나오고 일체 평등하게 거기에서, 그르고 옳은 게 다 거기서 나오니, 나오면은 바로 나오는 대로 재깍 자기가 알고 있단 말입니다, 또.

나오는 것도 알고 들이는 것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자성이. 그 자성(自性)의 원력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다 싼다 해도 두루 할 수 있는 그런 광대무변한 자리다 이겁니다, 자성 자리가. 일체제불이 같이 하고 있고, 일체제불이 있는 자리에는 일체 중생이 다 같이 하고 있다 이 소립니다. 이 말을 20년, 30년 이렇게 되풀이하게 만들어야 합니까? 되풀이를 하되 그 되풀이하는 말이 끝이 없군요. 그 뜻을 아시란 말입니다, 뜻!

본래 청정하다. 자성이 본래 청정한 걸 알고 있는 거죠. 청정한 걸 알고 있는 그 자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고정됨이 없이 “청정한 거는 깨끗한 게 청정한 게 아니라 구정물, 더러운 물, 고름물, 핏물 다 한데 합치는 것이 청정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고정됨이 없이 한 찰나에 나투면서, 즉 윤회라고 해도 되죠, 반복하면서 제자리걸음 하면서 그저 찰나찰나 바꾸어 돌아간다. 이 사람 만났다 저 사람 만났다 고정됨이 없다. 만남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먹는 것도 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이 육체를 가지고 지금 살고 가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그게 청정이라 한다. 그걸 거름 삼아서 내가 있는 것을 가지고 청정이라고 한다. 알고 있는 그 자체가 자성이다. 밝다. 지혜로워야 된다. 그 밝음을 깨닫는다.” 이런 말을 나뿐만 아니라 수차에 거듭거듭 선조들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대 성인도 말을 했고요.

 

거의 완치가 됐었는데 재발을 했어요

질문 선원에 나오기 전에 제가 몸이 좀 불편해서, 그 당시 큰스님 친견을 하고 가르침을 받고 또 병원 치료도 받고 해서 거의 완치가 됐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증세가 다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가 바른 공부를 못해 가지고 저의 주인공 자리에서 테스트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공부할 수 있는지요.

답변 집을 지을 때 기초를 하죠? 그럴 때에 자갈하고 모래하고 양회를 쳐 넣고는 그냥 들이다지죠? 첫 번부터 기초가 잘돼야 어느 집이든지 쉽게 헐어지지 않습니다. 너그럽고 지혜 있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자주 얘기했듯이 만약에 병 붙을 자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또 그 안의 모든 것이 한마음으로 돼서 둘이 아닌 도리를 이 속에서 모두 알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 현재의 사람이 그 도리를 완전히 모를 때, 집을 지을 때 기초하듯 다지고 또 다집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다시 병이 일어나면 어떠한 마음을 가질까 하고 테스트를 하는 도리를 모르십니까? 병이 아니라고 하고 체험을 하는 그런 도리가 있는가 하면요, ‘병에 걸릴 수가 없다. 병은 재료고 나를 가르치기 위해 바로 테스트하는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졌을 때에 ‘이건 이리 찔러 보고 저리 찔러 봐도 뭐, 그냥 하나도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데….’ 하고 물러서는 겁니다.

이 채찍질이라는 것은, 나를 내가 발견했을 땐 내 스승을 내가 얻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내 스승을 내가 만나는 것입니다. 나를 이끌어 가는 스승을 발견해서 스승한테 채찍을 맞는 겁니다. 맞으면서 공부하는 겁니다, 지금. 그럴 때는 그런 경고도 나올 뿐만 아니라 못된 짓을 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하하…. 그냥 누(累)가 되게, 저기 나가서 그저 아무 말이나 막 하라고 그렇게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무조건 믿기만 하고 그냥 함부로 해 버리나, 그렇지 않으면 믿는 반면에 ‘당신의 누가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없잖아.’ 하고 다시금 돌려놓는가 이걸 보기 위해서, 지혜로움을 가르치기 위해서, 나툼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든 거를 다시금 재출발을 합니다. 재다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집 기초를 하는 것과 같다 이겁니다. 기초를 어쭙잖게 해 놓으면 벽에 금이 가고 전부 이게 잘못돼 가지고 나중에는 기와 인 것도 그냥 잘못돼 가지고 씰그러지고 일그러지니까 전체 비가 새고 그럽니다. 그와 똑같은 얘기죠.

그러니까 솔직하게 얘기해서, 내가 병이 안 나는 게 아닙니다. 몸을 가졌는데 어찌 아프지 않으리까?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아프다 하면은 콧방귀 뀝니다. 하하하…. ‘네가 모든 사람들한테 그렇게 말하면서 네 몸이 아플 땐 어떻게 하겠는가?’ 할 때, ‘허, 참! 맘대로 해라, 네 몸 네가 끌고 다니는데 누가 뭐라겠니? 네 몸을 네가 끌고 다니는 거니까 심부름을 시킬 만하면은 그냥 끌고 가고, ‘이제 이런 거는 심부름도 못하겠구나.’ 할 때는 옷을 벗기든지 맘대로 해라. 입히는 것도 벗기는 것도 너 알아서 해야지.’ 그러고는 또 한 번 생각합니다. ‘내가 가겠다고, 옷을 벗겠다고 생각했을 때에 벗겨야지, 너 그러지 않으면 혼나!’ 하하하….

혼낸다는 거는 이렇게 상대를 두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없으니까 그 얘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없으니까 나를 없애고 그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나를 두고서, 나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면 경계가 되고 상대가 되고 이러니까 안 되죠, 그건.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이 원자라면 원자에서 입자가, 분자가 많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라서 완성이 된다면 그것이 또 원자가 되고요. 마음이 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부피가 늘어나도 늘어남이 없고, 또 많이 넣어도 두드러짐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냥 자유자재하게 내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여건을 쥐고 있다는 결론이죠. 여러분이 마음이 밝으면 태양계도 여러분이지 딴 게 아닙니다.

 

고기 먹고 술 하는 것에 대해서

질문 때때로 큰스님께서 가르치는 여러 생활의 방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 되는 경우도 부인할 수 없고, 심한 경우에는 몇 년간의 한마음 공부가 수행하는 태도에 오히려 방만과 자만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일은 작은 일에 불과하고, 술도 그렇고 다른 여러 가지 일도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것을 자재하자고 말하고 싶어도 왜 걸리느냐는 상투적인 반응이 싫어서 아예 모른 척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너무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난감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이 매사에 걸리지 않는 자재로움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에게 은근히 그것을 자랑하고 권하면서 스스로 그런 것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큰스님의 말씀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저희들을 깨우쳐 주십시오.

답변 애가 갓 태어나서 씹어 먹을 이가 하나도 없는데 고기를 줘서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못 먹는 사람은 안 먹어야죠. 그리고 어른은 씹어 먹을 수 있으니까 먹어야죠. 그거와 같이 이 마음공부를 하되 진짜로 맡기고 진짜로 물러서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는 먹는 것이 그 무명을 벗겨 주는 일이고, 그것을 못하는 자에게는 살생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양단간을 놓고 어떤 것이 옳으냐 이런다면 어떤 게 옳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살생이 되니까 먹지 말아야 하고 이건 무명을 벗겨 주니까 먹어야 하고,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옳습니까? 그러니 어린애는 먹지 말고 어른은 먹어라 이겁니다. 허허, 먹되 무명을 쓰고 애탄지탄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주인공에 맡기고 먹어라. 그 몸뚱이의 살점 하나를 그런 사람이 먹기를 바라면서 천 년을 기다리고 있다 이겁니다.

왜 그게 벗어나기가 힘드냐 하면, 소로 살았으면 소의 습성이 잔뜩 붙어서 그 영(靈)도 사람으로 가지 않고 소로 갑니다. 그래서 소를 면치 못해요. 개도 그렇고 다 그래요. 한 찰나 알았으면 훌떡 뛰어넘으면 될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무명을 벗지 못하고 세세생생에 그 모습을 쓰고 허덕이는 것이 바로 짐승들의 사연입니다. 그래서 그 무명을 벗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짐승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연히라도 선승(禪僧)들이 그 살점 한 점 잡숴 주시기를 원하고 원하고 그냥 염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생명을 죽이지 않고 풀, 이슬만 먹으면서 사는 짐승들도 많습니다. 그런 짐승들이 오히려…. 소가 왜 여물만 먹고 삽니까, 살생을 하지 않고. 그러니까 우리 인간도 잘못하면 소로 태어날 수도 있고 잘못하면 독사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반복돼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왜 이런 공부를 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걸 지혜롭게 들으셔야 돼요. 그리고 이 모든 게 자유죠. 그러니까 먹을 만한 사람이 먹든지, 먹을 만하지 않은 사람이 먹든지 그건 너희들 생각대로 해라. 지혜롭고 틀림없는 사람들 같다면 모든 걸 거기다 맡기고 먹되…, 옛날에도 이런 점이 있었습니다.

산간 절에서 스승이 다 죽게 됐어요. 제자가 생각을 하니 참 무엇을 어떻게 갖다가 병을 낫게 할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분에게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호미를 들고 통을 들고 나갔어요. 지렁이를 그냥 수백 마리를 잡아서 푹 고아 가지고선 그거를 체에다 착 받쳐 가지고 버리고선 ‘지옥을 가도 내가 갈 테니까 지옥을 보내든지 마음대로 해라.’ 하고 그냥 갖다가 드리니까 “이게 무슨 물인데 이렇게 맛있니?”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풀뿌리를 곤 물입니다.” 하니까 그것을 먹고 병이 완쾌돼서 건강하게 도로 다니시더랍니다. 그래도 그것은 풀뿌리라고 했더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갔겠네요?

그러니 예를 들어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거짓 아닌 거짓이 효가 된다 이랬죠. 자기가 죄를 받고 죄를 안 받고 그걸 떠나서, 오직 그 스승을 살리기 위해서 그 생명체들을 다 죽였다면, 그건 죽인 게 아니고 그냥 곧바로 인간으로 전부 환생을 시킨 거죠. 예를 들어 닭을 수십 마리를 죽였다 해도 닭의 마음을 한데 합치면 하나가 돼요. 아시겠어요, 그 뜻을? 닭 수효대로 사람으로 화하는 게 아니고, 닭 30마리면 30마리를 한데 합쳐서 한 사람으로 만들면 되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지렁이가 수십 수백 마리라도 그것은 한 사람으로 인간 환생을 시킬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착한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손들이, 부처님의 손들이 다 응신(應身)으로 화해서 응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그게 천도가 안되겠습니까? 그러니 살생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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