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베품을 생활 속서 실천하길

주위가 행복하도록 자신을 바꿔라

생활시도(生活是道) 라는 말이 있다. 우리네의 일상생활 그대로가 드러나 있는 진리라는 뜻 일게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뜻도 생활 주변에서 밉고 곱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 그대로가 진리와 한 몸을 이룬다는 의미일터. 다만 여기서 방점을 찍어 살필 일은 머물되 머묾에 집착 않는 무주상(無住相)의 교훈이 실천적으로 하나를 이룰 때 생활이 도(道)요, 평상심이 진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앓는 육체적, 정신적 모든 병의 원인은 대개가 집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모으고 당기며 쌓아두려는 소유욕이 걱정 근심을 키우며 재앙의 씨앗이 된다.

내가 이럴 수 있듯이 다른 사람도 이럴 수 있다는 이해와 섭수의 포용력은 다툼을 줄이고 마음을 편안에 이르게 한다. 내가 그 누구의 것이 영원히 될 수 없듯 그 누구도 나의 것이 영원히 될 수 없음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는 순간 갈등과 원망의 불길이 용서와 이해로 잦아들 수 있는 것이다.

내 것이어야 하고 내 편이어야 하고 나의 소유여야 한다며 나를 중심으로 한 아집(我執)의 편애증상은 화(禍)를 키우고 재앙을 불러들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몸의 기능만 삭아 내리는 게 아니다. 마음도 서늘하게 용기와 의욕을 멀리한 채 잠들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몸이 더 망가지기 전에 마음의 실타래가 다 풀리기 전에 마무리 하는 아름다운 회향이 있어야 한다. 가진 것은 나누고 베풀며 생활의 언어로 실천해야 한다.

이해하고 격려하며 칭찬하는 ‘애어보시(愛語布施)’를 일상의 언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마워하는 마음, 감사드리는 기도, 미안해하는 눈인사는 하면 할수록 아름답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고된 그림자만 남긴 채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야할 우리네 삶의 종착역이 다가오지 않겠는가.

미련도 후회도 뱀의 허물처럼 벗어버리고 두어 방울의 눈물방울 남기며 한바탕 잘 놀다 간다며 엷은 미소 남길 수 있게 개운한 마무리를 준비하며 살 일이다. 막힌 곳은 뚫어 주고 맺힌 곳은 풀어주며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마음 덮여주며 군불 지펴주며 진정한 의미의 나눔을 실천하는 생활의 지혜자가 되어야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과 자유를 위해 살아간다. 종교에 접근하고 신앙에 발돋움 하는 것도 보다 나은 행복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잘못 선택한 종교와 바르지 못한 신앙 행위로 인하여 재산 잃고 명예 잃고 삶의 길이를 줄이는 어리석은 행위는 주변에 널려있다.

신앙은 사닥다리에 오르듯 날이 갈수록 그 시야를 넓혀야 한다. 마음의 굳게 닫힌 빗장을 열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일궈야한다.

생각이 바뀌므로 운명이 바뀌고 마음이 열리므로 세상이 열리는 믿음의 생명력을 키워가야 한다.

하여, 나무로 만든 목불(木佛)과 돌로 만든 석불(石佛)의 신앙에서 한 걸음 더 나가 몇 백년 된 나무의 창창한 모습에서 건강한 자연 부처의 모습을, 바위의 늠름한 형상에서 믿음의 천연 부처를 발견하는 마음의 눈높이를 넓혀야 한다.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법당과 기도 도량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머무는 초가삼간의 초라한 집이, 아파트의 주거공간이 최고의 법당이요 기도드리는 도량임을 알게 될 터이다.

내가 극진히 모시고 경배드릴 분은 법당의 부처님보다 나의 부모요 반려자이며 아이들의 가족임을 깨닫게 될 터이다.

이것이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주지삼보(住持三寶)에서 별상삼보(別相三寶)로, 더 나아가 동체삼보(同體三寶)로 신앙을 완성해가는 아름다운 마무리인 것이다.

선지식(善知識)이란 누구에게나 착한 벗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선지식도 좋겠지만 우선은 가정이 평화롭도록 가족이 행복하도록 내 자신이 생각 바꿔 마음 열고 살 일이다. 평상심이 도(道)가 될 수 있게, 생활이 그대로 진리가 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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