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한테 꽃바구니가 배달되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만다라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장미가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연분홍 델피움과 노란 스토크는 활짝 웃고 있었다. 탁구공이 튀어 오르듯 연둣빛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며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라낭큐러스. 배추 잎 치마를 두른 리시안은 부끄러운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셀렘과 유카리도 손바닥보다 더 큰 잎을 감추며 이웃 꽃들이 돋보이도록 몸을 낮췄다. 이들의 조화로운 모습은 나를 잠시 행복하게 했다.

백합, 치명적 향기 내는 꽃
밀폐 공간선 향기 아닌 毒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다


그러나 꽃바구니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하얀 백합이었다. 심연을 드러내지 않은 고결한 자태와 매혹적인 향기란. 이런 까닭에 백합은 순결과 변치 않은 사랑이란 꽃말을 얻게 되었나 보다.

흰 백합은 순결과 처녀성의 종교적인 상징으로 중세에는 제단이나 성모 마리아 상을 장식하곤 했다. 프랑스의 부르봉과 독일의 프랑크 왕가, 이탈리아의 피렌체, 캐나다의 퀘벡 주 등의 문장(紋章)에는 백합 문양이 그려졌다. 이처럼 백합은 자태와 향기가 빼어나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중학생 시절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방에서 교복을 벗다가 그만 쓰러졌다. 책상 위의 꽃병에 듬뿍 꽂아둔 백합꽃 향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낮에 꽃밭에 핀 백합을 꽃병에 꽂고 방문을 닫아 두었더니 독한 꽃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찼던 것이다.

백합은 치명적인 향기를 내뿜는 꽃이다. 밀폐된 공간에 백합과 함께 오랫동안 있으면 강한 향기에 질식할 수 있다. 그래서 철부지들은 수백 송이의 백합과 함께 잠이 들어 영원히 깨어나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기도 한다.

백합 한 두 송이의 향기는 얼마나 싱그럽고 향긋한가. 그런데 이 백합 향기가 과하면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니. 그래서 예부터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보다.

향기가 좋다고 마냥 꽃향기에 취해있는 것도 세존께서는 향기 도둑이라고 말씀하셨다. 꽃향기에 빠져있는 그 마음에는 이미 향기를 훔치는 욕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향기를 내뿜는 백합, 그 향기에 빠져드는 인간. 모두가 비식(鼻識)의 탐착으로 이것은 오온(五蘊)의 유희 때문이 아닌가.

백합(百合)의 ‘백’자는 흰 백(白)이 아닌 일백 백(百)이다. 백 가지의 모임이라니. 백합의 알뿌리가 백 겹으로 둘러싸인 비닐줄기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합을 흔히 흰색 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꽃잎 색깔이 하얀 경우는 드물고, 흰 백합이 대중화가 되도록 원예작물로서 키웠기 때문이다.

청초하고 순결한 하얀 백합이 겉은 희고 속은 검은 백로 같이 느껴진다. 어디 백합뿐이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갈애(渴愛) 덩어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알아서 일체의 고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의 〈반야심경〉을 되뇌며 나의 비식을 경계한다. 딸아이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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