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진실하게 가지고 활달하게 생각하고 뛰어넘으세요

다시 부부로 또 태어나게 되는지

질문 큰스님 법문 중에 당나귀 부리는 주인이 다음 생에 당나귀와 부부로 나왔다는 말씀을 몇 번 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부부로 살다가 나중에 타계해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 할 적에 똑같이 또 부부로 태어나는지요. 제가 안사람 구박을 좀 하는 편이라 그것이 좀 궁금합니다.

답변 지금 살아생전에 어떤 사람은 그렇게 했답니다. “당신은 여자가 되고 한번 바꿔서 살아 볼까 하노라.” 그랬답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 해를 사랑을 하면서 그렇게 했는데, 그 사람이 죽었는데 그 이튿날 그 부인도 마저 죽더랍니다. 그랬는데 그 부인과 남편이 하루 사이에 죽으니까 제사도 그냥 같이 지내 버리고 장사도 그냥 같이 지내 버렸답니다. 그런데 자식들 꿈에 말입니다, 그 부부가 나타나서 하는 소리가 “얘야! 너희 아버지는 너희 딸로 나가느니라. 그런데 나는 여기서 태어날 수가 없겠구나.” 그러더랍니다. 그래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너희 아버지는 너희 집 딸로 태어나고, 나는 지금 저기 가서 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나야겠다.” 이러더랍니다,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그래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너희 아버지를 아내로 삼으려면 내가 먼저 태어나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더랍니다. 이 꿈을 꾸고선 자식이 이상하다고 나한테 물으러 왔어요. 정말입니다, 이건. 그래서 ‘야! 참….’ 평소에 그렇게 하셨느냐 하니까 평소에 그렇게 하셨답니다. 그랬다는데 뭐 걱정입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먹고 가는 게 제일 문제라 이겁니다.

어느 누구든 자기 마음으로 알면 통신이 되는 법이지,

남이 모른다고 해서 통신이 안 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마음이 바로 통신처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바세계의 모든 거를 다 그냥 아주 훌떡 벗어 버리려고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공부하는 거는 “선한 것도 놓고 악도 놔라.” 이랬거든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만약에 그렇게 또 태어나서 살다 보면, 선하게 살다 보면 악이 또 붙어, 가다 보면. 그러니까 선도 놓고 악도 놔야 되거든요. 그럼 이 세상에 뭐 굳이 나온다 들어간다 할 게 없죠. 왜? 여러분이 나이기 때문에. 내가 왜 몸을 받아서 또 납니까? 여러분도, 이왕 나온 몸들도 많은데. 그렇죠? 허허, 아, 순간순간 여러분이 내가 되는데 무엇 때문에 그럽니까? 아, 잘 좀 저거 하면 ‘아, 그 사람 참 잘 그려 가지고 나왔다. 그림을 잘 그려 가지고 나왔다.’ 하면, ‘너, 집이 참 잘돼 있구나.’ 그러면 아, 거기 좀 들어가서 며칠 살다 나오면 되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자유자재하게 살 생각을 한다면 그렇고요, 또 둘이 살면서 싸우고 고생을 하고 아웅다웅하고 그냥 그러고 정이 든다면 또 그렇게 한번 해 보시고 마음대로 하세요, 그건.

그러니까요, 평소에 부인을 구박을 많이 하시지 마시고요, 지금 사시면 그 몸으로, 모습으로 얼마나 많이 사십니까? 그러니까 그저 화가 나시더라도 부드럽게 말씀하시면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또 남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언제나 지혜로운 그런 폭넓은 그런 남자, 대장부로서 태어나서 이 세상을 아주 늠름하게 수백 명, 수천 명을 자기의 한생각으로써 이끌어 갈 수 있는 대장부가 되리라고 난 믿어 마지않습니다.

 

주인공 믿고 공부해서 합격하려면

질문 대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입니다. 며칠 전에 고3 법회에 갔는데 스님께서 ‘나를 버리고 주인공으로 살라’는 말씀을 해 주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지 법문을 들을 때는 ‘그래, 정말 나는 없는 거다.’ 하고 진짜 느끼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또 ‘정말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스님 법회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서 갑자기 자신감도 없어지고 어떤 때는 정말 믿지 못하고 나를 못 버리는 거에 대해서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하면 스님 말씀처럼 내가 함이 없이 주인공을 믿고 공부해서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질문을 올립니다.

답변 그런데요,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고 또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진다고 그랬죠? 그것이 가만히 편안하게 다 버리고 있으란 말이 아니에요. 어떻게 들었어요? 연방 발이 고정되게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떼어 놓는 거죠. 그러니까 아까 얘기할 때 ‘나를 버려야 된다’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자불이 하는 거다’ 한다면 나를 완전히 버리는 거예요. 안 그래요? 간략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나를 버려라.” 하는 것은 나를 버리고 중심, 즉 자불(自佛)만 믿어라 이 소리거든요. 학생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없으면 몸은 송장이 돼요. 내 몸이 없는데 어떻게 자불이 있겠어요. 그러니 몸뚱이는 자동차와 같고 자불은 운전수와 같고 기름과 같거든. 그러니 차는 운전수를 믿어야지요.

또 딴 걸로 비유한다면, 저 나무들이 뿌리 없이 사는 거 봤나요? 본래 자불과 학생의 육신은 같이 집을 삼아서 있어요. 저 봐요. 나무도 뿌리와 싹과 같이 달려 있죠? 본래 그렇게 돼 있다고! 그러니까 믿고 안 믿고가 없이 믿어야 돼요. 학생을 리드해 나가고 학생의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고 학생을 이끌어 줄 수 있고 해결해 줄 수 있고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바로 자기의 참기사니까. 그러니 시험을 보더라도 이거는 자불 주인공만이 이거, 이런 과목은 이렇게 할 수 있고 저런 과목을 볼 때 저렇게 할 수 있고 또 뭐, 동그라미를 그린다든가 거길 찍어서 놓는다든가 이런 데도 다 거기서 그렇게 하면서 찍고 돌아가야 돼요. 모르는 거는 이 안에서 하게 만들어야 되고 말입니다. 바깥에서 하면 도저히 올팡갈팡이 돼서 잘못돼요 .

이런 소리를 들었어요. 누가 방콕으로 처음에 갔는데, 여기서 시험을 봐도 안 된다 그러기에 그리로 가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가서 아마 절정에 도달했던 모양이에요. 자기가 말도 통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냥 아주 간절하게 했던 모양이죠. 그러니까 말의 뜻을 바깥으로 자꾸 마음에서 내 주니까 그 뜻대로 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방콕에서 말을 얼른얼른 배웠다는 거지. 금방 배워서 거기 졸업을 하고 또 중국으로 갔어요. 중국에 가서도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사람의 지혜로운 요량에 많이 달려 있어요. 그런데 부모들은 지금 이렇게 시급한 학생들을 놔두고도 그거 한마디 얘기 안 해 주는 부모들이 많아요. 그거 뭐, 돈이 드니 못해요, 재산이 없어지니 못해요, 글쎄. 자손들이 아무리 해도 말을 안 들으면 ‘너의 주인공과 나와 둘이 아닌 까닭에 다 너에게도 불이 켜질 것이다. 이거를 그저 배우고 또 앞으로는 점점 잘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관해 줘야 정작 싫다고 하는 사람에게까지도 뜻이 가지요. 그리고 따르는 사람한텐 연방 해 주고요.

어떤 사람은 하도 자기 엄마 말을 안 들어서 밥 먹는 테이블에도 붙여 놓고 벽에도 붙여 놓고 변소 안에도 붙여 놓고 그랬대요. 그랬더니 그저 그렇게 하는 거니까 한번 해 보자 했던 모양이지요. 그렇게 해 보고 가니까 살면서 아주 좋거든요. 그러니까 그 후에 엄마더러 그러더래요. “나는 처음에는 ‘어디 정말 되나 안 되나 보자.’ 하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누가 해 주고 가져가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시시때때로 그렇게 대치를 하고 보호를 하고 그렇게 나가는 겁디다.” 하고 고맙다고 하더래요. 그랬듯이 우리가 아무리 싫다 그러더라도 마음으로 관해 주고 벽에 붙여 놓고 한번 해 본다면…. 그건 진저리나게 하는 거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요. 하여튼 모든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마음먹기에 달린 건데 마음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분란이 일어나고 그러는 겁니다. 마음을 제대로만 먹는다면 분란이 날 것도 앞서 대처해서 없애 버릴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처음에는 항상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자불 불성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참나가 있는 줄 알아야 하고 그다음에 참나가 있으니까 그걸 믿고 여여한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여여한 줄 알았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걸 알아야 하고,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걸 알았다면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고 아무리 끝없이 해도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경경지에 이른다 이런 소리입니다.

 

지은 업대로 작용할 것은 분명한데

질문 인간 각자에게 과거에 지은 업이 있으면 그 업이 각자에게 작용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인류 전체가, 또는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이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업대로 앞으로 작용할 것은 분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근데 그 작용하는 것을 예견해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될 것이다’ 하고 예견한 것을 부인만 한다 하면, 그것을 우리가 어떤 능력 있는 분이 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모르지만 그 법칙이 작용한다 하는 것은 분명하고, 또 과거에 인류가 지어 놓은 업에 의해서 앞으로 그 업의 법칙은 작용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저의 생각이 옳은 생각인지요.

답변 그것은 작용이 안 될 수도 있고 작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능력이 없다면, 그래서 한 나라에 의인이 없다면, 예를 들어서 중국에서도 예전에 사신을 보내서 이 나라에 의인이 있다면 공물을 바치라고 안 했고요, 의인이 없다면 공물을 바치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했는데, 예전에도 예언을 한 사람들이, 노스트라다무스도 그렇고 소크라테스도 그렇고 뭐, 여러 가지 예언을 많이 했다고 봅니다. 정감록도 예언을 한 거라고 하지만 그건 예언이 아니라, 모든 천체의 천기를 알고서 자기가 얘기했던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거를 절반 이상을 없애야지, 그걸 절반 이상을 그냥 통째로 두었다가는 모르는 사람이 뛰어서 오히려 이 사바세계에 전체 혼란이 오겠구나.’ 해서 그냥…. 저절로 불에 탄 게 아닙니다, 그게. 저절로 불에 탄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게 그렇게 반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거를 가만히 볼 때, 그거를 그렇게 태운 것은 무슨 이치로 그렇게 태웠느냐. 야! 기는 놈이 있으면 나는 놈이 있다고, 그걸 써 놓은 사람이 자기 통한 대로, 자기가 그 물리가 터진 대로 써 놓은 거거든요. 아는 대로 써 놓은 거니까 그거를 반수 이상이나 지워 버렸단 말입니다. 지워 버렸는데 그것이 그대로 정감록에 정씨가 난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뜻으로 볼 땐 정씨가 아니거든요. 마음이 정직하고 진실하고 너그럽고 통달하고 이런 사람이 난다 이런 거지. 아니 그래, 정감록이라고 했다고 정씨가 납니까?

또 예언을 그렇게 많이들 했는데, 예전에 이라크 문제 때문에 예언의 말이 아주 많이 돌았습니다. “이렇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된다고 해서 인제 앞으로 이게 크게 불이 번질 것이다. 그러면 이거는 모두 살아남지 못한다.” 예언을 그렇게 했답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요, 나는 그냥 속으로 웃음이 저절로 이렇게 나면서 콧방귀 뀌었습니다. 왜? 아니, 그것을 그렇게 했으면 한번 훌렁 뒤집어서 좀 이익한 대로 평화롭게 살 수는 없어? 꼭 생각을 그렇게 해 가지고선, 생각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건데 왜 그렇게 생각을 해 가지고 그렇게 써 놨느냐 이거죠.

이거 보세요. 이것이 만약 앞뒤 없는 대피리라면, 앞뒤 없는 불바퀴라면 자기 마음대로 돌릴 텐데, 그리고 또 일체 중생이 자기 아님이 없는데 자기가 죽으려고 그렇게 해요? 아,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여러분이 전부 자기 자식들이라면 자기 자식들 죽이려고 그렇게 예언을 해 놓겠습니까? 난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아예 죄 살리는 걸로 해 놓겠어요. 예전에는 죽이려고만 무기를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할 수 있으면 살리는 무기를 만들게 했으면 해요. 제가 그런 능력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러분은 있어요. 마음을 항상 남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하면 내가 위해져요. 그리고 둘이 아니에요. 벌레 하나도 남이 지나가다가 쩍 밟으면요, 아파서 그냥 몸부림을 쳐요.

난 예전에 먹을 게 없어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려고 그러다가 진이 나오는 걸 보고 그만 깜짝 놀라서, 그걸 못 자르고 밑의 가장자리 순 이렇게 신 거 그걸 따서 짓찧어서 콩하고 저 뭡니까? 열무 이파리하고 그렇게 해서 먹었습니다만, 그것도 모든 게, 그 진 나오는 것도 피요, 그 흔들리는 것도 다 몸부림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죽여도 자비고 살려도 자비다.” 이랬습니다. 그건 왜냐? 만약에 나무를 자를 때는 그 목신은 내가 둘 아니게 첨보를 합니다. 그러면 그건 떼어 버리는 나무로다가 돼 버리죠. 그러니까 살생이 되지 않죠. 그래서 소고기가 고기로 보이면 못 먹는다는 얘기죠. 그 고기 한 점이 소 모습을 벗겨 줄 수 있는 도인에게 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먹으려고 쫓아갈 것도 없고 먹지 않으려고 뱉어 버릴 것도 없다 이겁니다. 인연 따라서 그 소 한 마리 중에 한 점이 오는 것이 소에게는 그 허물을 벗는 일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대안 대사는 소를 소로 보지 않고 고기를 고기로 보지 않고, 술을 술로 보지 않고 개를 개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다 똑같고 삶은 다 똑같고 살림살이는 다 똑같고 부모자식지간은 다 똑같고 이랬기 때문이죠.

그러니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좋은 생각을 해서 전 세계가 좀 더 평등하고 참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그런 뜻을 가질 수 있다면, 이 공부 하는 사람이 그렇게 가질 수 있다면 아마 머지않아 우리 남북통일도 될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을 믿는 사람은 그런 것이 그렇게 해도 무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 죽이지 않는 거다” 이러는 게 아니고, “싸우지도 않는 거다”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대로 하되 함이 없이 해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진묵스님이 말입니다, ‘저 절에 불이 났습니다. 불이 활활 타고 있습니다.’ 그럴 때, 급할 때 상추를 씻다가 상추를 그쪽으로 휭 던졌습니다. 그 상추가 그냥 비가 돼 가지고선, 그 상추에 묻은 물 한 방울이 전체의 비가 돼 가지곤 그 절 타는 데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서 그 절의 불을 다 껐답니다.

우리가 그런 도력이 생기는 것도 여러분이 하나하나 자기를 무시하지 않고, 자기 전생을 무시하지 않고 현실의 자기 마음으로 현실을 다스려 가면서 공부 열심히 하면서 행을 하는 게 문제입니다. 이론으로만 알고 행을 안 한다면 어떻게 실험이 되고 체험이 되겠습니까? 우리 ‘불(佛)’ 공부는,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이 불자들이 전부 실천하면서 바로 다스리면서 실험하면서 체험하는 겁니다. 그리고 ‘실상을 그대로 자유스럽게 산다’는 그런 뜻으로 배우는 거지 우리가 뭐, 떡이나 해 놓고 밥이나 해 놓고 빌고, 이렇게 노예가 되고 초자분하게 미신이나 되고 이러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요, 우리가 이런 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전력이 모자라고 그렇거든 충전을 하러, 아무도 없어도 좋습니다, 여기 와서, 이 스님네들 계신 데 와서 질문도 하시고 그러면서 같이 이렇게 얼굴을 쳐다보고 싱긋이 한번 웃어도, 그 전력은 바로 거기에 충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누굽니까? 모두 마음이 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른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몰라도 그 충전은 해 갈 만합니다. 그러니 그런 줄 아시고요, 비디오 법회를 하더라도 좀 나오셔서 같이 비디오 법회를 하시고 서로 토론하시고, 그리고 음식이라도 같이 앉아서 참 서로 웃으면서 먹고 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건강도 하고 또 우리가 충전도 할 겸, 바람도 쐴 겸, 내가 능력을 길러야 위로 부모의 은혜를 갚고, 묵은 빚을 갚고, 아래로는 햇빛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얻지 않겠습니까? 부디 그것을 부탁하는 바입니다.

 

절에서 하는 행사의 참다운 의미

질문 예로부터 절에 가지 않던 분들도 초하루, 보름은 절에 가서 보시도 하고 절을 하고 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날은 ‘법계에서 총 점검하는 날’이라 들었습니다. 저는 일요일 날이 초하루, 보름이 돼야 갈 수 있고, 평일이면 가지 못하고 축원만 올리는 때도 있거든요. 일요일이라도 공무나 개인적인 피치 못할 사유로 못 갈 때는 ‘가지 못했다, 게을렀다’는 것에 걸려서, 다음 날 선원에 가서 보시를 하기도 하고 주인공 자리에 관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도 못 갈 때가 있지만요. 절에서 하는 행사에는 꼭 가는 것이 좋은지, 참다운 의미를 되새겨서 올바른 공부로 정진코자 하오니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절에서 하는 어떤 행사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주와 직결이 되고 수레바퀴처럼 우리 인생이 돌아가는 그 근본 자체가 바로 우리 마음에 직결이 돼 있습니다. 가설이 돼 있고요. 그러니 어느 누구든 자기 마음으로 알면 통신이 되는 법이지, 남이 모른다고 해서 통신이 안 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마음이 바로 통신처입니다. 우주의 일체 만물만생이 다 내가 한생각 내는 것에 의해서 전부 통신이 되고, 한마음으로 직결이 돼서 처리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과 더불어 한데 합친 한마음이 여러분을 지켜보는 바 없이 지켜보는데, 남이 지켜보는 것보다도 여러분 마음에서 아는 그 자체가 그대로 더불어 한마음에 즉각즉각 통신이 된단 말입니다. 그걸 거짓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항상, 모든 것이 돌아가는 그 자체를 그저 주인공 뿌리만이 알 수 있고, 뿌리만이 다스릴 수 있고, 뿌리만이 해결할 수 있고, 번뇌를 녹일 수가 있고, 영계성, 세균성 또는 유전성, 업보성, 인과성을 다 녹일 수가 있는 것이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 현실을 상응하면서 모든 거를 녹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생각하지 마시고 절대성을 가지고 거짓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있어 바로 이 마음 씀씀이와 행동 하나, 말 한마디까지도, 귀로 듣는 것도 조심하고 입으로 말하는 것도 조심해서 행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남의 일에 참견을 해서 이간질을 시키는 문제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해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마음이니 정성을 안 들이고 보시를 안 해도 된다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거기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가 부처님 아니라 더한 사람이라도 때에 따라서 ‘내 몸도 여래의 집이요, 도량의 부처님 자리도 만 중생과 한자리 하는 소중한 곳이니, 이 집을 운영하려면 우리가 해야 할 테니까, 그저 초하루, 보름에 내가 축원을 올리면서 정성을 들여야겠다. 이게 바로 남의 집이 아니라 내 부처님의 집이지.’ 하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이것이 더불어 한마음의 법당이 되는 것이고, 내 몸이 바로 극치적인 법당이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자기네 집도 법당인 것입니다. 모두가 법당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모두가 부처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어찌 “이건 부처가 아니야. 이건 형상이야.” 이렇게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 역시도 또한 나의 몸이나 똑같은 건데요.

그리고 우주를 싸고 있는 부처님의 마음이 거기 서리고 있는 이상 어찌 그것을 무시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법당에 들어가면 들어가는 대로 마음이 엄숙해야 되고 항상, 내가 혼자 앉아 있다 하더라도, 하다못해 변소에 갔을 때도 엄숙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게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재빨리 가볍게 내뱉는 그런 마음을 갖지 말고 좋아도 스무드하게, 아주 언짢아도 스무드하게 지켜볼 수 있는 그런 자세가 바로 자비이며 지혜입니다.

그러니 다가오는 인연 외면하지 말고 가는 인연 잡아끌지 않으면서 주어진 여건에서 나라는 고정된 틀을 벗어날 수 있도록 지극하게 실천을 하고 가세요. 고정된 마음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면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마음을 진실하게 가지시고, 활달하게 생각하고 뛰어넘으세요, 매사에 다 그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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