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없는 계단을 밟아서 차원의 급수를 높일 수 있어야

우리가 진짜로 사는 게 아니니까 모든 것을 다 거기 놔라.

선장이 있는데 선장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그 선장한테 맡기고 놔라.

 

이번부터는 질문과 토론에 역점을 두자고 지난번에 말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대화가 없고 서로 이렇게 악수가 없으면, 그 둘이 아닌 도리를 영 캄캄하게, 이론으로만 듣지 자기가 실천으로 옮겨 보지 못하기 때문에 토론을 하자고 했습니다. 나도 질문을 할 것이지만 여러분도 질문을 하시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질문자1(남) 큰스님, 항상 한량없는 자비심으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평촌에 사는 신도입니다. 제가 한마음선원과 인연을 맺은 지 5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물러서지 않고 정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수원 지역의 여러 도반들과 법사 스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지금은 이 마음공부의 도리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꼭 알고 가야 하고, 깊게 맛보고, 더 나아가서는 깨닫고 가야 할 유일한 보물로 생각하고, 크든 작든 간에 생활 속에서 이 법의 도리에 따라 정진하고 노력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저의 작은 체험을 한 가지 말씀드리면서 함께 공부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지금은 제가 이렇게 합창 단복을 입고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만 2, 3년 전까지만 해도, 하고는 싶었어도 바쁘다는 생각에 갇혀 가지고 도저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신규사업 일로 한 달에도 서너 번씩 해외 출장을 간다든지, 출장을 가지 않더라도 항상 퇴근이 늦는 편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엄두를 낼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6월에 ‘마음을 진짜로 한번 내어 보자, 되는지 안 되는지 한번 해 보자.’ 하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합창단에 덥석 가입을 해 버렸습니다.

그 후로는 합창 연습이 있는 날은 다른 약속이나 회사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열심히 관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 보니까 출장을 가게 되더라도 그 날은 쏙 빼고 가게 되고, 또 저녁에 생기던 그 많은 약속들도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묘하게도 연습에는 빠지지 않도록 주인공이 전체를 다 조절해 주는 듯 했습니다. 저를 잘 아는 도반들은 “회사에서 그렇게 나와도 안 잘립니까?” 하고 농담을 자주 던지곤 합니다. 지금 저는 회사에서도 안 잘리고 있고, 합창단에서도 안 잘리고 잘 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되돌아보니까 합창단에 가입을 하기 이전에도 하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결국은 간절하지 못했던 것 같고, 지금은 꼭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진정으로 있었기에 여건은 쉽지 않았지만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한생각을 얼마만큼 간절하게 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이 합창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작은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일이든지, 될 것인지 안될 것인지 생각으로 헤아리기보다는 근본 자리인 참주인에게 몰락 맡겨 놓고 저는 심부름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을 해 가려고 합니다. 아직은 속을 때가 많습니다마는 이렇게 살아 보니까 마음도 편하고 여간 든든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회사에서 월급이 깎인다든지, 구조조정이다, 정리해고다 해서 다들 불안한 상황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것을 해결하고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주인공 너 아니냐. 네가 잘 인도해!’ 하고 주인공에 굳게 맡기고 당당하게 나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도리를 가르쳐 주신 스님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엊그제 넘긴 7월의 달력에 ‘이 생에서 한 차원을 더 올려라.’ 하시는 스님의 법어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아서 더 최선을 다해서 정진을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기회를 통해서 제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그러한 시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고 형성돼서 인간까지 왔으니만큼, 이 인간 중에서도 진짜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모든 것을 벗어나야 한다.” 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죠. 그러니까 이 마음의 주장자 자리를 완벽하게 해 놔야 된다는 건데, 이게 결국은 보림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수억겁을 통해서 겪어온 관습이나 욕심이나 아상, 아만 이런 모든 거, 딴 사람은 죽어도 내가 살아야겠다 하고 잡아먹는 거, 딴 사람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 하고 정신을 뺏어 먹는 것, 이런 행위를 함이 없이, 둘 아니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둘 아닌 도리를 이렇게 배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이제 어지간히 좀 알았다고 할 때…, 내가 여러분한테 여지껏 질문 한 번도 해 본 예가 없죠, 네? 그게 여러분이 완숙되도록 노력을 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싹이 나서 너풀거려야 바람이 부는 소리도 듣고, 흙냄새도 맡고, 거름 주는 것도 알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바람이 분다 하면 뿌리를 좀 널따랗게 잡는다거나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알고 이런 식물이라고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압니다. 그러니만큼 일체 만물만생과 더불어 둘 아닌 도리를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부터 알기 위해서는 다스리는 의식과 그 모두가 내 주인공으로 통일돼야 됩니다. 그래서 찾으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진짜 믿어라, 진짜 믿는다면 한군데서 그 선장이 중생들을 이끌고 다 조복을 받는다, 이런 겁니다.

그러면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을 다 둘 아니게 조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모두가 항상 그렇게 한군데서 들고 나는 거지 여러 군데서 들고 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군데가 아니고 내 이 한마음에서 들고 나죠. 예를 들어 말하자면, 반가워서 악수를 할 때 마음이 먼저 갑니까, 손이 먼저 갑니까? 마음이 먼저 가고 안 가고 간에 마음이 일어나니까 손이 가는 겁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반가운 사람이라면 반갑게 마음이 내어지고, 또 그냥 인사를 해야겠다 하더라도 인사하기 위해서 손이 갑니다. 그거 뭐 정확합니다. 또 마음이 안 가는 사람한테는 손이 안 내밀어지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차원이 주어지고 삶이 주어지고 모습이 주어집니다. 그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여러분은 많이 해 보셨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습이 주어지고 삶이 주어지고 또는 차원이 주어집니다. 차원이 주어지기 때문에 모습과 삶도 주어지는 거죠.

지금 테레비를 많이들 보시죠. 거기에서 연기하는 것을 보면 아주 진짜처럼 하죠. 진짜로 잘하죠. 역을 맡아 가지고 그렇게 잘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진짜처럼 잘하는데, 우리도 진짜처럼 살고 있단 얘깁니다. 탤런트들처럼 그렇게 자기의 차원에 따라서 삶도 주어졌고 모습도 주어졌으니까, 그렇게 주어진 대로 그대로 살아야지 거기서 빼고 끼우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팔자 운명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 자유자재권을 갖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이왕 사람이 되었다면 그런 계단 없는 계단을 밟아서 차원의 급수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돈오는 갑자기 어린애를 낳아서 “으-앙” 하고 우는 거를 말하는 것이고, 자라기 위해서 바깥에 나와서 세상을 살면서 배우는 것을 바로 점수라고 이름할 수 있겠죠.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탤런트처럼 사는데, 가만히 생각들 해 보십시오. 우리가 탤런트라면 그냥 아무 역이나 자기에게 주어지는 대로 맡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데 여러분한테 진짜로 죽는 역, 또는 아주 하(下)의 사람의 역, 강도 역, 사기 역, 그런 역을 맡아서 나가라면 아마 안 나갈 겁니다, 죽는 역은 더군다나. 그렇죠? 진짜로 죽는다면요. 그런데 그 탤런트들이 진짜로 죽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역을 맡아 가지고 나간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진짜로 사는 게 아니니까 모든 것을 다 거기 놔라. 선장이 있는데 선장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그 선장한테 맡기고 놔라.’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들고 나고 들고 나고 하는 것을 다 거기 놨을 때 그것이 일차적인 보림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완벽하게 보림이 돼야…,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오륙도 같은 데, 깊은 산속 같은 데, 걸어가다가 큰 돌이 서 있으면 ‘참, 저 돌 잘생겼다.’ 하고 쳐다볼 수도 있죠? 또 그런 곳이 아니라도 이렇게 지나가다 보면 뭐든지, 작든지 크든지 말입니다. 비실비실하고 비틀어지고 뿌리를 박지 못한 나무 한 그루도 그렇고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나무들이나 돌이 손을 내밀면서 내 손을 잡아 달라고 한 그런 예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이것도 공부의 단계니까. 또 없어요? 나무들이나 돌이나 어떠한 거든지 손을 잡아 달라고 한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까? 들은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엄연히 손 없는 손이 내민 겁니다. 손 없는 손이 나에게 손 없는 손으로 ‘잡아 다오.’ 한 겁니다. 그러면 잡아 주는 순간 둘이 아니게 그냥 하나가 돼 버리고, 하나가 되었다가 또 둘이 되고, 이렇게 자유자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없는 손을 건져 줄 때는 없는 손에다 넣으면 손이 둘이 아니게 되고, 형체가 없으니 그대로 여여하다는 뜻이죠. 그래서 둘 아닌 공부의 실천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나를,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진화시키고 형성시킨 자기 자신과 통했단 얘깁니다. 통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그 나무로 통해 가지고, 돌로 통하든지 해 가지고 자기를 가르치기 위해서 ‘손 좀 잡아 다오.’ 하는 겁니다. 둘 아닌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이것을 이론으로만 알아서는 도저히 무(無)의 세계의 법도를 모르고, 무의 세계의 공법을 모르고, 무의 세계의 가고 옴이 없는 도리를 모른단 얘깁니다. 그리고 실천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분들이 있다면 여기서 벌써 싹이 트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싹이 트여서 그 싹은, 예를 들어서 거기까지, 그 나무까지 목신하고 둘 아니게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내 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은 다 합일이 됐다는 얘기죠. 조복을 받았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거기서 무의 도리로, 이것을 손 없는 도리로, 손이 있든 없든 그대로 둘 아니게 건질 수 있다는 얘기고 또, 배우는 도리입니다. 그게 두번째 보림할 수 있는 도리를 배우고 가는, 즉 말하자면 무의 공법입니다.

그러니까 예전 같으면 ‘너 귀신 방귀씨 얻었느냐? 얻었다면 내놔 봐라.’ 이렇게 말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는 살아 있을 때, 생전에 이 공부를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린 바쁩니다, 지금. ‘지금 살아 있을 때 하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이게 아닙니다, 이어 갑니다. 그래 자꾸 그것을, 은산철벽을 정으로 쪼는 것처럼 자문자답하면서 자꾸 놔야 하겠죠. 그리고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잖아.’ 하고, 저녁에 자기 전에라도 15분이고 20분이고 그렇게 앉아서 단련을 하게끔 하는 것도 아주 필요합니다. 울지 않는 어린애 젖 주는 법 없죠. 여러 애들 중에도 그냥 막 악을 쓰고 우는 어린애를 얼른 안아서 젖을 주게 돼 있거든요.

여러분은 걱정하고 이러는데, 뱃속에 어린애가 들었을 때에 태가 있고 젖줄이 있습니다. 그 애는 자랄 때 젖줄을 잡고 자랍니다. 여러분도 그 주장자가 바로 젖줄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 젖줄을 잡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거죠.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도 죽을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삶이 없이 그냥 공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수할 때, 마음이 가니까 손도 그냥 불쑥 가더라, 이러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손이 심부름하듯이, 몸은 물질세계에서는 표현하는 것이죠. 표현을 할 때 쓰는 도구예요, 이 몸뚱이가. 진짜 마음은 좋고 나쁜 걸 가려서 딱 악수를 하는데, 그 좋고 나쁜 거를 먼저 가려 놓으면 그 다음에 손이 가죠. 그러나 죽기보다도 싫은 것은 어쩔 수가 없지요.

우린 일상생활에서, 내 몸속에서, 내 몸으로 움죽거리는 데서 모두 아셔야 합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는 상대를 모르는데 상대를 모르면 어떻게 처리를 합니까. 그래서 육안으로 살던 사람들은 심안이 밝아져야 하고, 심안이 밝아서 사는 사람들은 법안을 알아야 하고, 법안을 알아서 사는 사람들은 또 지혜로운 눈을 가져야 하고, 그 뒤에는 부처님과 더불어 같이 불안으로서의 눈이 돼야 된다는 얘기죠. 그런데 우리가 다 올라가서 꼭대기에 가서 보면 심안이다 불안이다 육안이다, 이런 게 그냥 다 없어져 버립니다. 자유권으로서 자유스럽게, 육안으로 보려면 보고, 심안으로 보려면 보고 뭐, 맘대로 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죠. 때에 따라선 질문을 할 때에, 즉 정신세계의 무의 법이 닥쳤을 때, 이 심안의 스승이 자기를 인도할 때…, 왜냐하면 ‘부(父)와 자(子)가 상봉을 해야 한다’ 이럴 때는, 즉 말하자면 부는 자기 조상입니다, 즉 자기입니다. 자기와 지금 현재의 자기가 둘이 아니게 상봉을 했다 할 때, 그것이 상봉을 해 가지고 고정되게 만나고만 있으면 공법이 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 평소에 생각을 하면 애비가, 즉 주인공이 내 지금 마음으로 그냥 하나가 돼 줘요. 그리고 마음이 가만 있으면 이 자(子)가 그냥 거기에 한데 합쳐져 버리구요. 아버지로 하나가 돼 버린단 말입니다. 지금 부르는 건 이름입니다. 가만 있으면 그냥 애비 부처가 돼 버리고, 생각을 했다 하면 그 애비가 자식한테로 하나가 돼 버리는 거예요. 생각을 했다 하면 자식으로 돼 가지고…, 그러면 또 보현보살이 되죠. 그게 이름이죠. ‘아, 내가 뭘 해야겠다, 이걸 해야겠다.’ 하고 생각을 하고 일어나게 되면 보현이 돼 줘요. 그냥 일시적으로 보현이 돼 준단 말입니다. 부처다 법신이다 보현이다 따로 없이 그냥 부처, 문수가 보현이 돼 줘요, 그냥. 하나가 돼 버려요. 하나가 되면 그대로 움죽거리게 되죠.

그래서 보이지 않는 데에, 즉 ‘움죽거리지 않고 움죽거리는 것과 움죽거리면서 움죽거리는 것과 이게 둘이 아니다.’ 하는 소리는, 악수하는 걸 봐도 이게 동시에 떨어지는 거지, 마음이 가면 손도 그냥 동시에 가는 거니까 이게 모두가 둘이 아니다는 겁니다. 무(無)의 법이 따로 있고 유(有)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동시에 있다는 것을 여여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가 모든 거를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만법을 자유스럽게 들이고 내는 걸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들이고 내는 자유로운, 그 자재로운 생각이 그대로 법인 줄 알아야 한다. ‘법이다’ 그러면 그냥 거기서 법으로 판단이 나지만, ‘공법이다’ 이런다면 판단이 나면서도 공해서 지혜롭게 돌아가죠. 너도 나도 다 편리하게요. 그러니까 이 안에서부터 모두 이렇게 발현이 돼서 내가 그 소리를 듣게끔 되고, 바깥에서 하는 소리를 듣게끔 되고, ‘손을 잡아 다오.’ 하는 소리를 듣게끔 되고, 내가 손을 잡아 줄 수 있고 이런다면 손을 잡는 순간에 둘이 아니게 되고, 나를 거쳐서 내 그릇에 들어갔다가 금방 거쳐서 그냥 화현이 되고….

천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난리가 나고 그랬을 때, 만약에 길을 가다 오다 천도재를 지내 달라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지내 줘야 옳겠습니까? 뭘 차려 놓고 그렇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 도리를 알면 그 자리에서 바닷물이라도 만들 수 있고, 또, 배가 고파하면 전부 배부르게 먹인다 이겁니다, 법공양으로. 그래서 천도를, ‘나’를 거쳐서 하게 되면 그냥 이런 잔소리가 필요없는 거죠. ‘나’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그냥 스쳐 가기만 해도 그건 천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도재가 따로 없죠. 그래서 물건을 쭉 차려 놓고 천도를 하면 점점 덧대기가 붙어서, 그 습이 그냥 떨어지질 않아서 조상들을 영 천도를 할 수가 없어요. 불종자로 만들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두 불종자는 불종자인데 불성의 자리에서 싹이 나게 할 수 없단 얘기죠.

 

질문자2(남) 심인회 총무입니다. 이 자리에 앉게 돼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사실 생활 속의 불법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려고 했는데 스님이 이미 좀 얘길 하셨는데요, 그래도 또 하겠습니다.

생활과 불법이 따로 있지 않고 또 마음공부와 생활이 따로 있지 않는데, 사실은 개인적인 가정 일이나 일상적인 일은 마음공부 하기가 쉬운데요. 우리가 먹고 자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직업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직업이라는 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보니까 문제가 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즘 와서 직업이 갖는 가장 큰 특징으로 경제의 논리와 경쟁의 논리가 있습니다. 첫번째, 경제의 논리는 조금 노력하고 많이 받아 가는 것이구요. 두번째, 경쟁의 논리는 남을 내가 꼭 이겨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 두 가지를 잘해야 자기가 속해 있는 직장에서도 잘하는 사람이고 자기가 하는 일도 잘한다고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와 네가 없고 너와 내가 없는 그 본래의 마음자리에다, 자신의 집착과 성공하고자 하는 이런 마음을 놓는 수행을 하다 보니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느냐 하면요. 같은 직종에 있는 다른 분들이 볼 때 ‘저 사람이 선원에 다니면서 직업에 대해서 좀 나태해졌다.’ 또는 ‘자기 하는 일에 열심이 아니다.’ 이런 결과가 간혹 발생하는데 어떻게 처리를 해야 되는지 질문드립니다.

큰스님 그건 마음이 지혜롭지 못해서 그렇죠. 그게 바깥으로 보입니까, 나태한 게? 하하하….

질문자2(남) 그게 아니구요, 모든 직장이 평가를 하게 됩니다. 일등 이등 삼등, 이렇게 평가를 하게 되는데 사실은 일등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가 노력한 것보다 많이 받아야 되고, 또 반드시 기존에 일등하는 사람을 누르고 자기가 일등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이치하고….

큰스님 그래요. 그런데요, 일등을 하든 일등을 못 하든 그 소관이 주인한테 있어요. 마음에 있단 말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마음이 가니까 손이 갔지 마음이 안 가는데 어떻게 손이 갈 수 있느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댁은 하는 게 없어요,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악수만 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한 사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하되 함이 없는 것이다, 이거죠. 즉 말하자면 마음이 한 일이지 그 펜대를 쥔 손이 한 게 아니단 얘기죠.

질문자2(남) 그러면요, 차후에 이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우리 선원 식구 중에서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고 또 위대한 어떤 인물도 나올 수 있어서, 물론 저는 우리 선원이 안양에 있고 우리 지원들이 좀 허름한 데 있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선원이 때에 따라서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또 나라의 대통령도 공부도 같이 시키고, 이럴 수 있는 날이 와야 되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큰스님 허허허…, 그거는 사람들마다 다 자기 근기에 따라서 하는 것이지요. 지금 학으로, 경을 배우는 학승들이나 그 제자들은 많지만 선 제자들은 드뭅니다. 선방에 가서도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하고 관하는 게 아니구요, ‘이게 뭣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딴 화두를 잡고 간화선을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있죠. 그런데 우리가 볼 때에 ‘선이다’ 하는 것도 이름일 뿐이니, ‘자기 자신을 알라’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自神)을! ‘자신을 믿어라’ 이런 겁니다. 없어서 찾으라는 게 아니라 ‘믿어라’ 이런 겁니다, 본래 있으니까. 그러니까 자신은 체가 없습니다, 공정하게 합니다. 남을 해롭지 않게 공정하게, 자기도 밥줄 떨어지지 않게 공정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 자기 주인한테다 맡겨 놔라, 이겁니다. 공정하게 할 것을 믿고 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8년 8월 2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
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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