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개조 천태지자 대사

천태지자대사 진영

타력(他力)수행이란 아미타부처님께서 염불하는 중생을 모두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거두어주심을 굳게 믿고서, 곧장 보리심을 내어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수행을 하는 것이오.”-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

순풍에 돛 단 듯이 나아가는 ‘이행도’
이 법문은 “번뇌망상에 얽매인 범부가 어떻게 시방 삼계(윤회계)를 벗어난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에, 천태지자(天台智者, 538-597) 대사가 직접 답한 것이다.
지자 대사는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 가피에 편승하여, 중생 자신의 근기와 정성이 부처님의 원력과 서로 감응함으로써 곧장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닦기 쉬운 길(易行道)’로 부연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순풍에 돛 단 듯이 나아감에, 잠깐 사이에 천리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타력수행에 해당한다.”

법화 삼매 삼칠일 청진
대중에 ‘지혜로운 자’ 호 받아
말년 염불 이론 근거 마련

천태종 개조가 염불법문 전한 까닭은
정토수행의 골수를 설하고 있는 이 법문을 본 불자들은 의아할 것이다.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 등 천태교학을 확립한 천태종의 실질적인 개조(開祖)인 지자 대사(천태종 제4대 조사)가 정토법문을 설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정토종의 조사들은 대부분 후대에 추존된 분들이며 이 가운데는 영명연수 선사와 철오 선사 등 선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정토성현록〉 등에는 선종은 물론 천태종, 율종 등 다양한 종파의 큰스님들이 등장한다. 이는 모든 종파의 고승들이 명심견성(明心見性)한 후 중년이나 말년에 염불삼매로 보임(保任)하거나 정토왕생을 발원한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장경의 3분의 1에 달하는 경전에서 정토법문이 설해져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천태지자 대사의 삶을 따라가 보면 이러한 흐름들이 보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서방정토와 인연
양무제(梁武帝) 대동(大同) 4년(538년) 7월에 태어난 지자 대사의 이름은 지의(智?), 자는 덕안(德安), 성은 진(陳)씨이며, 형주(荊州) 영천(潁川)사람이다. 모친이 향기로운 연기가 오색으로 아롱지어 그의 몸을 감싸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이 되어, 열 달 후 출산함에 신비로운 광명이 방안을 황홀하게 빛냈다고 한다. 태어난 아기는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는 제왕의 상(相)이었으며, 눈썹이 여덟 무늬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대사는 아주 어렸을 때, 누우면 꼭 합장을 하였고 앉아있을 때는 반드시 서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자라서는 불상을 보면 시키지 않아도 절을 했으며 스님들을 만나면 항상 인사를 드렸다. 일곱살 때 부모님을 따라 절에 갔는데 그 절 스님이 보니 보통 아이가 아닌지라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읽어 주었더니, 한번 듣고는 그 많은 글을 전부 다 외웠다고 한다.
18세에 상주(湘州) 땅 과원사(果願寺) 법서(法?) 스님에게 출가하여 곧 〈법화경〉 전체를 외우고 율장과 여러 대승경전을 공부했으며, 이후 혜광(惠曠)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혜사선사 문하에서 법화삼매 증득
진(晉)나라 문제(文帝) 원하 원년(560), 선(禪)을 좋아했던 지자 대사는 광주(光州) 땅 대소산(大蘇山)의 혜사(慧思) 선사를 참문하였다. 초면임에도 혜사 선사는 “옛적에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법화경〉 법문을 같이 들은 인연으로 오늘날 다시 만났다”고 말하고는, 보현도량의 네 가지 안락행(安樂行)에 대해 설법하였다.
이에 지자 대사는 대소산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으며 삼칠일(三七日: 21일)을 정진하던 중 〈법화경〉 ‘약왕보살품(藥王菩薩品)’에 “이것(약왕보살의 소신공양)이 진(眞) 정진이며 이 이름이 진(眞) 법공양 여래(如來)”라는 대문에 이르러 신심이 활연(豁然)하게 정(定)에 들어 법화삼매를 증득, 모든 법상(法相)을 크고 밝게 깨달았다. 그는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서 여전히 〈법화경〉을 설하고 계시는 모습을 선정 속에서 보았으며, 나중에 제자에게 “영산에서의 회상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천하 제일 법사로 ‘소 석가’ 명성
지자 대사가 그와 같은 사연을 혜사 선사에게 말하니, 선사는 “그대는 선다라니(禪陀羅尼: 모든 법이 공한 도리를 체득)를 얻은 것이니 앞으로 모든 설법인 가운데 제일 가는 법사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후 지자 대사는 과연 천하에 제일가는 법사가 되었다.
그 변재(辯才)는 천녀의 변재처럼 미묘한 것이었으며, 설법은 청산유수(靑山流水)처럼 막힘이 없었다. 그의 법문을 듣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발심 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명성이 천하에 떨치게 되자 ‘석가여래의 화현(化現)’ 또는 ‘중국의 작은 석가(小釋迦)’라는 칭송까지 듣게 되었다.

36사찰 창건, 천태종 기초 다져
31세가 되자 지자 대사는 금릉(金陵) 와관사(瓦官寺)에 주석하며 선법(禪法)을 널리 펼쳤다. 38세에는 태주(台州) 천태산에 이르러 북쪽 봉우리에 암자를 짓고 천태종의 터전을 닦았다. 그 후, 대사는 금릉과 여산(廬山), 형양(荊揚) 사이를 주유하다가 수(隋)나라 개황(開皇) 14년(595), 천태산으로 돌아왔다. 천태종의 기틀을 만든 지자 대사는 무려 36곳의 절을 창건하고 80만 구(軀)의 불상을 조성했으며, 승려 1만 4천 명을 직접 출가시켰다. 많은 물고기를 사들여 살려 주었으며 60여 곳에 방생연못을 지었고, 조정에 어류 포획 금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무려 20여 부 150여 권이란 방대한 저술을 남길 정도로 세간과 출세간을 더불어 교화하니 당시의 불교교육이 크게 성행함은 물론이었다. 진(晉)나라 왕 양광(楊廣)이 대사로부터 보살계를 받을 정도로 그를 존중하여 ‘지혜로운 자(智者)’란 호를 내릴 정도였다.

반주(염불)삼매 닦고 ‘정토십의론’ 저술
천태종의 종주(宗主)로서 수나라 때의 불교 중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사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정토수행에 전념하였다. 지자 대사는 〈관무량수경〉에 의거한 관상(觀想) 및 관상(觀像) 염불로 이론적인 근거를 삼았지만, 염불삼매를 주로 닦았다. 소리 내어 염불하거나 마음속으로 염불해서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계속 이어지게 하는 반주삼매(般舟三昧)가 바로 그것이다. 대사의 명저인 〈마하지관(摩訶止觀)〉에 따르면 이 염불삼매의 요점은 “몸으로 걸음을 옮기고, 입으로 소리를 내고, 마음속에서 생각할 때마다 오직 아미타불을 잊지 않고 자신 안에 있게 하는 것(步步 聲聲 念念 唯在阿彌陀佛)”이다. “모든 존재가 꿈과 같다고 염(念)하되 쉬지 말라”며, 반야와 공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염불삼매를 닦은 대사는 〈정토십의론〉을 남기는 등 정토종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관음ㆍ세지보살 접인 받고 좌탈 왕생
지자 대사가 서문(西門) 석성사(石城寺)에서 임종에 이르자, 제자에게 명해 침상을 동쪽 벽에 마련하되 서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대사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향을 피운 후 〈불설무량수경〉을 독경한 뒤 게송으로 설했다.
“48원으로 훌륭하게 장엄해놓은 그 좋은 극락정토에 왕생을 원하는 자가 극히 적다. 지옥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한생각 돌이켜서 아미타불을 염하여 왕생하길 발원하면 왕생을 얻게 되거늘, 하물며 계정혜(戒定慧)를 닦은 수행인이랴. 그대들은 왕생극락을 굳게 믿어 의심하지 말라.”

최초의 등신불로 국청사 지자대사탑에 봉안
제자들이 스승에게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과위(果位)를 묻자, 지자 대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만약 대중을 이끌지 않았다면 반드시 육근이 청정했을 것이다. 내 수행을 줄이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였기에 내 과위(果位)는 단지 원오품(圓五品)일 뿐이다. 여러 선지식과 도반들이여, 지금 관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나를 접인하러 오셨구나.”
대사는 이 말을 마친 후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마치 삼매(三昧)에 든 것처럼 편안히 극락세계로 왕생했. 이때 대사의 연세는 67세요, 개황 17년(597년) 11월 24일 미시(未時: 오후 1~3시)였다. 대사의 육신은 다비하지 않고 등신불로 봉안되었다. 이는 중국불교 최초의 육신불(육신보살)로 오늘날에도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國淸寺) 지자대사탑에 봉안되어 많은 가르침을 소리 없이 전하고 있다.

천태지자대사 진신탑.

“육도윤회 벗어난 극락왕생 의심 말라”
요즘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과연 극락이란 곳이 있을까? 죽은 후 어디로 갈까?’ 하는 의문을 품는 이들이 많았나 보다. 당시 천향사(天鄕寺)의 혜연(慧延) 스님은 대사의 원적(圓寂) 소식을 들었지만 도저히 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 후 혜연 스님이 ‘대사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몹시 궁금해하면서 〈법화경〉 사경으로 은연 중에 그 답을 기다렸다.
하루 저녁에는 꿈에 서쪽에서 관세음보살이 금색 신(身)으로 광명을 놓으며 나타나시는데, 그 뒤를 보니 지자 대사께서 계시면서 하는 말씀이 “너는 아직도 내가 왕생극락 한 것을 믿지 않고 있느냐?”고 하시고는 사라졌다. 스님은 그제서야 대사께서 왕생한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석가여래의 화현’이라고까지 칭송을 들은 지자 대사까지 왕생극락을 발원하셨으니, 후대의 우리는 더 이상 극락정토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노는 입에 염불하여 속초성불(速超成佛: 신속의 윤회계를 벗어나 극락에서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성불함)의 기연을 맺으시길 발원한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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