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와 목동 이야기 下

‘쌍민(雙泯)’ 궁극의 반야지혜와 합일한 상태로 커다란 일원상으로 묘사된 실상반야의 모습. 〈십우도〉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1158~1210)은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법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한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우리나라 조계종의 수행지침과 중흥의 맥을 마련하셨습니다.

지눌스님의 ‘마음 닦는 방법’을 기술한 〈수심결(修心訣)〉에는 돈오점수의 수행법을 말합니다. “어떻게 돈오하느냐”는 질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보고 듣고 웃으며 말하고 화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른 갖가지 것을 운전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의심을 품게 합니다.

보명본 마지막 ‘일원상’ 그려
대승불교 여래장 사상 표현해
곽암본, ‘입전수수’ 보살행 강조
깨닫고 실천함이 곧 수행 완성


그리고 진리에 들어가는 다양한 문(門) 중에서도 ‘소리를 듣는 성품(聞性)’을 회광반조하게 하여 공적영지한 본성을 체험케 합니다. 중생이 세상과 소통하는 여섯 가지 문 또는 채널인 육문(六門), 즉 안(眼)-보는 것·이(耳)-듣는 것·비(鼻)-냄새맡는 것·설(舌)-맛보는 것·신(身)-몸으로 느끼는 것·의(意)-의식하는 것 중 어느 것을 택해 ‘이 뭣고’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여섯 가지 촉(觸) 중에서도 많은 선사들이, 깨달음 체험의 지름길로, ‘듣는 것은 무엇인가’ ‘듣는 것의 주인공을 찾아라’라고 추천해 주셨습니다.

〈능엄경〉에서도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제시합니다. 즉 소리, 청각에 집중하여 원통의 진리를 체득하는 수행법입니다. 만해 한용운도 오세암에서 ‘쿵’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크게 깨닫게 됩니다. 그 때 그가 읊은 오도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그걸 아는 사람 몇몇이나 되는가
한 소리에 온 세상 크게 깨닫나니/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나부끼네
- 만해 한용운의 오도송

자, 그럼 우여곡절 끝에 우주만물과 하나가 되는 깨달음 체험을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다 끝난 것일까요. 선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네요. 그리고 ‘깨달은 후의 목우행(牧牛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선정과 지혜’ 그리고 ‘자성문과 수상문’의 방법론을 상세하게 풀이하십니다.

“범부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나고 죽을 때 아상을 굳게 잡고, 망상과 뒤집힌 생각 등 무명의 온갖 습관들이 오래도록 성격을 이루어, 비록 문득 깨달았어도 옛 습관을 갑자기 없앨 수는 없다”라고 하시면, 만약 ‘점수’하지 않으면 “경계에 따른 번뇌 망상이 깨닫기 전과 별다름 없을 수 있다!”고 지눌 스님은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반야’로서 공력을 키우지 않으면, “다시 윤회의 고통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하의 선지식들의 깨달은 후의 목우행이, 바로 반야로서 비추어 살피고 또 살펴서 궁극의 열반에 드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눌스님의 호가 ‘목우자(牧牛子)’인 이유가 여기 있었네요.

보명본과 곽암본의 차이는?
보명본 〈목우도〉는 제1장에서 제8장까지, 총 10장 중 제8장까지 장면에 소가 등장합니다. 무명업장을 상징하는 소를 반야 지혜로 정화시켜 나가는 여정이 참으로 오래 걸리고, 그것이 여정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사납고 방자하게 으르렁거리며 계곡과 산길로 치달으며 아름다운 싹을 침범하며 아직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제1장 미목)에서→ 고삐로 코를 뚫어 잡아매어 처음으로 말을 듣게 하고(제2장 초조) → 기존의 달리고 달아남이 쉬어지고 조복하여 수행을 점점 받아들이는 단계(제3장 수제)에서→ 오랜 기간이 흘러 공력이 깊어져 드디어 밖으로 치닫던 미친 심력이 부드럽게 다스려지고, 지혜가 생활 중에 더 많이 작용하는 반환점(제4장 회수)에 오게 되며, 이 때부터 제9장 독조, 둥근 지혜의 달이 허공에 드러나는 단계까지 소는 동자와 여정을 함께 합니다.

이제는 내버려 두고 “목동이 굳이 끌지 않더라”도 저절로 길들여 다스려지게 되고(제5장 훈복) 어떤 장애나 거리낌도 없어 동자는 나무 그늘에서 한가하게 피리를 붑니다.(제6장 무애)

그 다음 단계는 동자는 소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안 써도 될 만큼 편안해 집니다. 그래서 아예 눈을 감고 졸고 있네요.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잡니다.(제 7장 임운)

다음 장면은 동자와 소가 속세를 벗어나 허공 속에 있습니다. 배경이 바뀌었습니다. “밝은 달이 드러나니 구름이 사라진다.” 검은 소는 흰 소로 변하였고, 꼬리 끝에만 검은 색이 살짝 남아 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모든 무명업장이 사라지고 지혜의 달이 항상 있는 단계(제 8장 상망)입니다.

〈입전수수〉 ‘제대로 돌아오기 위해 출가했다’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행이 십우도의 마지막 장면이다. 순천 송광사 십우도 벽화.

그리고 다음 단계는 소가 화면에서 아예 사라져 버립니다. 번뇌장 및 소지장을 모두 타파한 셈이군요. 이제 동자는 홀로 밝습니다.(제9장 독조) 마지막 장면에서는 동자마저 사라지고 일원상만 있습니다.〈사진1〉

“사람과 소가 보이지 않고 자취가 묘연하니/ 밝은 달빛이 차니 만상이 공空하다/ 누가 만일 그 가운데 진실한 뜻 묻는다면/ 들꽃과 풀꽃 절로 총총하다 하리라.”

이렇듯 보명본은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10장에서 비로소 일원상이 나타납니다. 일원상은 지혜의 완성 또는 대열반과의 영원한 합일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곽암본은 모든 장면이 애초부터 일원상 속에서 전개된다는 것이 다릅니다. 우리는 항상 크나큰 지혜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모르고 있어도 함께 하고 있다는, 모르고 있어도 그 속에 있다는, 모든 만물 속에는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그 자리가 이 자리라는, 대승불교의 여래장 사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애초에 그림에 반영됨으로써, 우리는 크나큰 공(空)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십우도를 보아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참으로 버겁게 느껴지던 무명업장도 별 일 아닌 듯 작게 느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어차피 공의 바탕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구나라고 안심이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대우주의 바탕 속에서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한낱 그림자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곽암본의 위대함은 이러한 견지를 원상 바탕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소의 모습이 곽암본에는 단지 네 장면(제3장 견우, 제4장 득우, 제5장 목우, 제6장 기우귀가)에만 나옵니다. 반면, 보명본에서는 제1장에서 제8장까지 소는 집요하게 나타납니다. 목우, 즉 지혜를 키워 업장을 소멸해 나가는 것이 그림의 대부분으로 80%를 차지합니다. 곽암본에서는 단지 네 장면에서만 나타나고 기우귀가(제6장)한 뒤에는 바로 사라집니다. 제7장 망우존인에서는 동자와 지혜의 달만 있습니다.

여래장과 보살행, 수행의 완성
보명본과 곽암본과의 또 다른 큰 차이점은, 보명본은 일원상이 활짝 나타나면서 끝납니다. 하지만, 곽암본은 일원상〈제8장 인우구망〉이 나타난 다음에, 두 장면이 더 있습니다. 〈제9장 반본환원〉과 〈제10장 입전수수〉입니다. 깨달음만 여여하게 드러난 이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깨달음의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겠지요. 어차피 우리는 이생에 몸을 갖고 있기에 다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때의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이제는 반야 지혜가 함께하는 몸입니다. 그래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가,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예전의 산과 물이 아닌 것입니다. 반야지혜가 세상을 비춥니다.

그리고 그 다음인 대망의 마지막 장면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보살행’의 실천입니다. ‘입전수수’는 다시 세간으로, 이제는 (출가할 때와는 달리) ‘반야의 몸’을 가지고 들어가, 온갖 겉치레와 상(相)을 다 버린 채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입니다.

‘제9장 반본환원’의 여여(如如)한 자연의 모습은 여래장의 실천적 모습인 ‘실상반야’를, 〈제10장 입전수수〉의 속세로 향하는 스님(또는 포대화상)의 모습은 ‘보살행’을 상징합니다. “가슴을 헤치고 맨발로 거리에서니/ 흙을 바르고 재투성이지만 얼굴 가득 웃음/ 굳이 신선의 비결 쓰지 않아도/ 바로 가르쳐 마른 나무에 꽃 피게 한다.(입전수수入廛垂水: 속세로 들어가다.)”

곽암본 십우도에서는, 수행의 완성인 마지막 장면으로 설정한 것이, 보명본에서처럼 반야열반이 아니라, 바로 ‘보살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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