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존자 이야기

영가를 모신 벽련대 장면, ‘용주사 감로탱(龍珠寺甘露幀)’ 1790년, 수원 용주사 소장

우리나라 사찰의 영단(靈壇)에 걸리는 ‘감로탱’은 대대적으로 거행되는 ‘공동 천도재’의 장면을 옮겨 그린 것입니다. 만약 당시에 사진기가 있었더라면, 감로탱 화폭에 담긴 모습은 공동 천도재의 현장을 한 컷 찍은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중생의 육안에만 보이는 모습만 찍힌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눈(佛眼)또는 지혜의 눈(慧眼)으로 보이는 장면도 찍혀 있습니다. 바로 ‘영가(靈駕)가 천도되는 모습’입니다. 중생의 육안에는 한 상 잘 차려진 시식단과 병풍과 스님의 재(齋) 올리는 광경만 보이겠지요.

공동 천도재를 옮겨 그린 감로탱
혜안으로 본 영가 천도 모습 담겨
벽련대 위 여의주, 영가의 眞본체
小자아·大자아 합일, 깨달음 과정


하지만, 천도재가 벌어진 이곳 현장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하게 벌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천도재를 주재하는 스님의 시식의 순서에 따라 영가가 모셔지고, 부처 보살님들이 납시어 가피가 내리고, 그 영험함으로 (존재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영가는 드디어 천도되게 됩니다. 이때 시식을 주재하는 스님과 참가 신자들의 마음이 얼만큼 청정하냐 그리고 또 간절하냐에 따라, 천도의 성공률이 달라지게 됩니다.      

‘아귀’서 ‘여의주’의 모습으로
이러한 천도재의 생생한 풍경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감로탱입니다. 감로탱의 일반적인 구도를 보면 ①중생들이(자신의 업대로) 각양각색으로 살다가 다양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俗界)→ ②아귀의 모습의 영가로 본 모습을 드러냄. 이는 해탈하지 못한 영가의 모습인데 중음(中陰)기간에 해당→ ③부처님의 왕림으로 법(法)의 가피, 즉 감로(甘露)가 내림, 이렇게 3단계로 그림 내용이 전개됩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오면, 예를 들면 ‘용주사 감로탱’과 ‘백천사 감로탱’ 등에는 이 같은 3단계 과정의 그 다음 과정인 4단계 ‘영가(靈駕)가 성공적으로 천도된 모습’이 추가됩니다.

즉, ‘벽련대에 실려 극락으로 향하는 영가’의 모습까지 그려집니다. 아귀의 모습의 영가는 환하게 빛을 발하는 여의주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밝고 투명한 여의주(작은 원상)의 모습을 하고 바야흐로 커다란 깨달음의 바탕(큰 원상)으로 계합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천도된 영가를 모신 벽련대’의 도상은 감로탱 뿐만 아니라, ‘극락도’에서도 발견됩니다. 즉, 속세에서 영가천도를 통해 극락으로 이운되어 온 모습이라고 할까요. 마치 감로탱 속의 천도를 마친 영가 벽련대가 극락세계로 고스란히 옮겨간 듯 한 풍경입니다. 그래서 영가를 모신 벽련대라는 공통적인 도상을 매개로, 감로도 속의 속계와 극락도의 극락세계가 서로 연차적으로 연결되는 현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관음시식의 마지막 부분이 아미타불 염불인 극락왕생으로 끝나는 것과 마치가지로, 감로도와 극락도라는 두 개의 다른 장르의 불화가, 천도라는 관점에서는 서로 연계됩니다.

감로도의 화면 상단에 나타나는 영가 천도의 벽련대 모습은 참으로 우아하고 기품 있게 표현됩니다. 형식을 살펴보면, 커다랗고 높은 탁자와 같은 사각대 위에 푸른 연꽃(碧蓮) 모양의 좌대(臺)가 있고 그 위에 금니(金泥)로 채색된 작은 원상(圓相)이 모셔져 있습니다.

벽련대 위에 모셔진 작은 여의주 위로는 화려한 장식의 보개(寶蓋)가 있어 여의주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벽련대 주변으로는 주악 천녀들이 에워싸고 풍악을 울리고 있고. 위쪽으로는 오색 번(幡)을 휘날리며 천녀가 일렬로 늘어섰네요.

벽련대와 이를 호위하는 천녀의 군상 뒤로는 이 전체를 감싸 안듯 커다란 원상이 후광(後光)처럼 둘러 있습니다. 벽련대 위에 해탈한 영가의 작은 여의주(小圓相)가 크나큰 깨달음의 바탕인 커다란 원상(大圓相)으로 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작은 원상이 큰 원상으로 수렴 또는 합일’되는 모습은 개체적 불성이 큰 바탕의 불성으로 계합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둥글고 오묘한 법, 진리의 모습이여/ 고요뿐 동작없는 삼라의 바탕이여//이름도 꼴도 없고 일체가 다 없거니/ 아는 이는 성인이고 모르는 이는 범부라네 -의상조사 〈법성게〉 중에서

벽련대 위에 모셔진 여의주는 영가의 진실된 본체로, 영주(寶珠)·자법성(子法性, 아들법성)·순수 의식·환영체·사념체·작은 자아(小我)·영가·선가 등 다양하게 불립니다. 물론 관점과 불교종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지만, 어쨌든 깨달은 개체적 자아는 작은 원상(또는 작은 불성)으로 그려집니다. 감로탱에는 두 개의 원상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벽련대 위에 모셔진 영가의 본체에 해당하는 작은 원상이고 또 하나는 벽련대 전체를 둘러싸는 배경의 큰 원상(빛)입니다.

가운데의 여의주, 해탈한 영가의 모습 (작품정보 상동)

아들 법성이 어머니 법성으로
유명한 옛 선사님들의 영가천혼 법어를 검토해보면, “영식(靈識)에게 깨닫게 하여 무명(無明)을 타파하게 하고, 공적영지(空寂靈知)가 드러나도록 한다” 또는 “몸은 죽었으나 영식(靈識)이 있어 이에 고(告)한다” 등의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대(四大)가 흩어지고 남은 이것을 주로 ‘영식(靈識)’이라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식(唯識)의 관점에서 본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하는 것은 ‘식(識)’일 뿐이겠지요. 그래서 영식을 업식(業識)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같인 작은 원상이 큰 원상으로 합일되는 해탈의 과정에 대해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후세계에서 사자(死者)의 몸은 빛나는 환영체라고 부를 만한 성질을 갖는다.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밝음의 상태가 사자에게 나타난다. 사자가 이 상태에 있을 때 (사자의 서에 기술된)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실천하면 어머니 진리 세계와 아들 진리 세계가 만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는 카르마(업)의 지배를 벗어나게 된다.”

여기서 ‘어머니 진리 세계와 아들 진리 세계’는 해당 저서의 각주를 참고해 보면, 산스크리트어 ‘Dharma Matri Putra’로 직역하면 법성모자(法性母子, 어머니와 아들의 진리 세계)로 번역됩니다. 영가가 성공적으로 천도되기 위해서는 ‘子(아들)’의 법성이 ‘母(어머니)’의 법성으로 합일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깨달음의 과정을 ‘소아(小我)가 대아(大我또는 眞我)로 합일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이해와 맥락을 같이합니다. 죽은 이의 순수 의식이 투명한 빛으로 해탈해야 법신과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신앙적 맥락에서는 어머니 법성을 ‘아미타부처님’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존재의 근원과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틀림없이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되리라.”

미술로 보는 불교상식
벽련대 용어의 뜻과 의미

감로탱에 묘사된 작은 원상의 영가를 모신 연화대(蓮臺) 및 사각 받침인 대좌(臺座) 등을 통칭하여, 기존의 문헌에서는 ‘벽련대반(碧蓮坮畔)’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벽련대반의 용어의 근거는 관음시식(觀音施食) 〈증명청(證明請)〉 대목 ‘手擎千層之寶盖 身掛六銖之花蔓 導請魂於極樂界中 引亡靈 向碧蓮坮畔 大聖引路王菩薩摩訶薩 唯願 慈悲 降臨道場 證明功德(손에 천층의 보개를 받들고/ 몸에 온갖 꽃목걸이 걸치시고/ 영가를 극락으로/ 인도하시며 망령을 이끌어/ 벽련대반으로 향하게 하시는/ 큰 성인 인로왕보살이여/ 원컨대 자비로 강림하시어/ 증명의 공덕을 베푸소서)’이다.

그 용어의 쓰임을 보면, ‘망령을 인도하여 벽련대반으로 향하게 한다(引亡靈 向碧蓮坮畔)’라고 하여 바로 앞 구절의 극락세상을 말하는 비유의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육도윤회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푸른 연꽃 대좌가 있는 연못으로 향하게 한다는 표현이니, 이는 영가를 이끌어 극락의 연못에 ‘연화화생’ 또는 ‘극락왕생’하게 한다는 것의 의미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정리하면, ‘벽련대반’이라는 용어는 ‘극락의 푸른 연꽃 물가’ 즉 ‘극락의 연못’을 지칭하고, ‘향벽련대반(向碧蓮坮畔, 극락의 연못으로 향한다)’은 ‘극락왕생’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문구이다.

그래서 영혼을 모시는 ‘탈 것’이라는 의미로 쓸 때에는 대좌의 의미만 살려 ‘벽련대’라고 지칭한다. ‘벽련(碧蓮)’의 대(臺)라고 청정한 옥빛 같은 ‘파란 연꽃’을 강조한 이유는, 파란 빛은 ‘자비(慈悲)’를 표현하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불성은 지혜(깨달음, 아는 마음)와 자비를 그 성품으로 갖고 있다. 번뇌와 무명의 영가가 해탈하기 위해서는 자비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미타 부처님의 좌우에는 지혜(깨달음)를 상징하는 대세지보살과 자비를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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