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호북성(湖北省) 양주(襄州)는 삼(麻)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당나라 때 여기서 생산되는 특산물인 삼을 나라에 세금으로 바쳤다. 한 장정이 나라에 바쳐야할 최소한의 양(量)이 삼 세근을 바치는 것이었다. 일종의 납세의 의무였던 것이다.

동산수초(東山守初:910~980) 선사가 양주의 동산에 머물고 있을 때 어떤 학인이 찾아와 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하기를 “마삼근(麻三斤)이니라.” 라고 했다. 이는 나라에 바치는 장정 한사람 몫인 최소 단위의 삼 세근을 말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 세근이 부처’란 이 말은 이후 유명한 공안이 되었지만 부처를 남에게 물을 수 없다는 말이다. 부처는 내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내 몫일 뿐 남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마치 나를 남에게 물을 수 없다는 뜻과 같은 말이다. 가령 내 이름을 내가 기지고 있는 것이지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겠는가?

『무문관(無門關)』 18칙에 이 ‘마삼근’을 평가한 말이 이렇게 설해져 있다. “동산이 방합선(蚌蛤禪)을 공부하여 조개와 같이 두 입술을 떼자마자 뱃속의 간장을 모두 드러내 보였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생각해 보라. 어디에서 동산의 본래 뜻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게송을 읊었다. “느닷없이 삼 세근이라고 말하니 그 말도 친절하고 뜻도 더없이 친절하구나. 옳으니 그르니 시비를 말하는 사람은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에 빠져 있는 사람일 뿐이다.(突出麻三斤 言親意更親 來說是非者 便是是非人)

방합선이란 조개가 입을 벌리면 속이 다 드러나는 것과 같이 ‘삼 세근’이란 말 한 마디에 진실을 모두 보인 선이란 말이다.

『벽암록(碧巖錄)』 12칙 평창(評唱)에는 “이 공안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씹기가 어려워 아무나 쉽게 입을 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담박(淡泊)하여 아무 맛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또 말하기를 “이 ‘삼 세근’은 장안으로 통하는 큰 길이 한 길로 쭉 뻗은 것과 같이 발을 들거나 내리거나 이 길을 밟지 않고 갈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이 화두는 운문이 제시한 ‘호떡(餬餠)’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어렵다. 오조법연(五祖法演)이 게송으로 말하기를 값싸게 팔아먹는 장사들은 ‘삼 세근’을 저울에 달아 재고 있구나. 천, 백 년 동안 팔리지 않아 묵혀 둔 물건인데.”라고 하였다.

운문(雲門)의 ‘호떡’은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에게 어떤 학인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말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대답해 준 말이다. 운문은 동산의 스승이다. 운문의 ‘호병’과 동산의 ‘마삼근’을 같은 류의 화두라 한다. 물론 ‘조주포삼(趙州布杉)’도 있다. ‘조주포삼’이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지만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하는 질문에 답한 말을 두고 나온 말이다. 조조주의 대답은 ‘내가 청주(靑州)에 있을 적에 베적삼을 한 벌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斤)이었네.’였다. 이 화두를 ‘조주포삼’이라 한다.

『운문광록』에 운문과 학인과의 대화는 이렇게 나온다.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말은 무엇입니까?” “호떡이다.”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운문이 이어 말했다. “그대는 분명하지 않은 상태로 다른 사람이 조사의 뜻을 말하는 것을 듣고서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을 묻었다. 그대는 무엇을 부처라 하고 무엇을 조사라고 하기에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을 하고 삼계를 벗어나는 길을 묻는가?”

『벽암록』 평창에는 또 “만약 ‘호떡’을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말로 안다면 무슨 활로가 있겠는가? 호떡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또한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활로이다. ‘삼 세근’도 같은 종류의 화두이다.”라고 했다.

우리나라 고려 때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1) 선사가 지어 부른 노래인 ‘태고암가(太古庵歌)’에 “운문의 호떡과 조주의 차는 이 암자의 아무 맛도 없는 밥에 비하여 어떠한가? 본래 이러한 옛 가풍을 놔두고 누가 그대에게 기특하다 논할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운문의 호떡이나 조주의 차는 음식으로서의 맛이 아니라 선미(禪味)의 맛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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