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성찰로 깨닫는 공의 이치

한가위도 지나고 이제 가을에서 겨울로 지나가고 있다. 하늘이 한없이 높고 청명 하니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는 듯하다. 가을의 차분함과 겨울의 정결한 기운이 느껴지는 탓일까? 삶을 돌아보며 무언가를 정리하고 결심해야 할 것만 같다. 바야흐로 성찰의 시기인가 보다.

성찰은 스스로를 살피고 관찰함을 통해 우리 모두를 성숙하게 하고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올 한해를 성찰해보고 내년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알아보기로 하자.

도연 스님


空 상태, 아무 것도 없는 것 아냐
무한한 지혜·창의성 발현 가능해
인간관계 문제도 원만 해결 이끌어
미워하는 마음 사라지면 자유 찾아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 그려진 흰색 도화지가 있어야 한다. 덧칠을 할 수도 있겠지만, 기왕이면 아주 깨끗하고 새하얀 바탕에서 새로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흰색 도화지를 만드는 작업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 본다면 과거의 인연을 정리한다거나 마음과 기억 속에 담긴 많은 사연들을 정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초기화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밤사이 자고 일어나면 기력이 회복되며 전날의 근심과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사라진다. 마치 컴퓨터를 잠시 껐다 켰을 때 메모리가 정리가 되면서 더 성능이 빨라지고 뜨거웠던 기계의 열이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 열심히 활동하고 나면 휴식이 필요하듯 삶을 정리정돈 할 때에도 그러한 이치가 적용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새롭게 리셋(Reset)된 마음 상태인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비우는 명상과 수행의 과정을 통해 공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나를 돌이켜 보는 성찰의 핵심인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리정돈을 위해서는 반드시 비워짐(공)을 경험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나의 마음과 생각은 초기화가 되고 텅 비워지며 맑아진다.

과거의 성현들은 이러한 공의 상태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다. 먼저, 공민왕 때 왕사를 지냈던 나옹 선사의 누님이 염불을 배우고 나서 스스로 읊었다는, ‘부운(浮雲)’에 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空手來空手去是人生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공수래공수거시인생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태어남은 어디서 오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중략)
獨有一物常獨露 澹然不隨於生死 (독유일물상독로 담연불수어생사)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있어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공수래 공수거, 우리의 한 생애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하고 허무한 것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와 가치가 분명히 있다. 위의 시에서는 그것을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 한 물건’이라고 했다. 과연 비워진 마음에서 느낄 수 있는 그 한 물건이란 무엇일까?
조선시대의 서산 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가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수 없고, 모양 그릴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비춰보아,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없는 줄 믿어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한 물건’에 대해서 마음으로 비우고 스스로 비추어 보아야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그것은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 그것은 인연을 초월한 다른 영역의 힘과 질서이기 때문에 우리의 얽히고설킨 인연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수심결(修心訣)에서 스스로를 지켜보는 나로서 공적한 영지 (空寂靈知)를 말씀하셨다. ‘모든 것이 다 빈 곳에 신령스런 앎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승의 핵심 경전인 반야심경에서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추어 보면 공함을 알 수 있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텅 빈 상태에서 나타나는 충만감과 신령함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 비워진 가운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무한한 지혜가 나오며 뛰어난 창의성과 창조력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나도 남도 모두 좋을 수 있는 새로운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것을 이룰 힘도 생긴다. 일상에서 머리가 비워지면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에서의 성찰을 생각해 보자. 텅 빈 충만감에서 나오는 힘으로 자신을 정리하면 나는 이미 새로운 사람이다. 전날의 복잡한 상태에서는 스스로를 정리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성찰을 통해 정리된 자기 자신은 더 이상 복잡하지 않다. 따라서 상대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풀어갈 수 있다.

고요하고 편안한 가운데 나를 섭섭하게 한 인연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일단 마음으로 나를 아프게 한 그 일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게 잘 안된다면 마음속으로 용서해본다. 서로의 관계를 공함으로 이끄는 것이다. 결국 관계성도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걸릴 게 없으면 된다. 내 마음에서는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문제는 해결 된다.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직접 만나더라도 그 문제로 인해서 괴롭지 않다. 오히려 성숙한 인간관계로 발전한다.

이번엔 역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은 없는지, 원한을 살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진 않았는지 살펴보자.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마음속으로 용서를 구하고 그 일이 없던 공의 상태로 돌아가 보자. 잘 비워지지 않는다면 참회의 마음으로 기도를 해 본다. 더 이상 마음에 걸림이 없다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나서도 편안할 수 있다.

과연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손해를 본 사람이든 손해를 준 사람이든 모두 마음속에는 좋지 않은 악업이 쌓이게 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관계성에서의 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좋다. 좋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 즉 공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성의 공도 내 마음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것은 용서와 감사의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은 초월적 힘과 사랑(자비)을 발생시킨다. 그 따뜻한 힘이 과거의 인연을 정리해 준다. 처음 만났을 때 아무 일 없던 시절보다 공을 경험한 둘 사이의 관계는 더 성숙해져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텅 빈 충만감, 즉 공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누구를 만나든 어디에 있건 존재 자체로 평온하고 모든 관계를 행복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공의 상태에서 올바른 성찰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온전한 무(無)의 상태에서 올바른 유(有)를 지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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