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치 꽂아서 밥해서 그냥 먹는 걸 배우는 겁니다!

마음의 에너지를 쓸 수 있으려면…

질문 새해에도 큰스님의 법희 충만한 자비의 가르침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발원합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등불 삼아 어두운 사바세계에서 하루하루, 저 자신뿐만 아니라 저를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저희 식솔들을 마음법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내 안의 무한 광대한 에너지를 마음껏 활용하면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라고 하셨는데, 저는 제가 하는 일에서조차 제대로 꺼내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술년 새해에는 내 안의 충만한 마음의 에너지를 저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쓸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일러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부처님 법에 대해서 내가 더 말을 안 해도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거와 일체 만물이 사는 거와 고정됨이 없이 찰나에 나투면서 돌아가는 그 모두를 봤을 때 일체가 내 생명 아님이 없고 내 살림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는 까닭에 더 이상 불법(佛法)이 이러니저러니 얘기할 것이 없는 겁니다. 하지만 말을 해야 하니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또 그렇게 생각하시게 되면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오죠.

한마음의 찰나 생활이 그대로 역력히 돌아가고 있으니
여러분이 그대로 자유스럽게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기르시라 이런 겁니다.

말을 하는 순간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하면서 불이 들어오는 거와 같이, 여러분의 마음과 내 마음, 일체제불의 마음이 통틀어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그 자체를 아신다면, 그 일심조차도 공(空)해서 이 세상이, 우주 법계가 그대로 여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지만 내 마음 밖에서 찾는 것은 공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운전수가 차를 끌고 다니지 차가 운전수 끌고 다니는 것 보셨습니까? 운전수는 중심을 잡고서, 위로는 기름을 넣고 아래로는 차를 끌고 다닙니다. 이게 바로 중용이며 중심입니다. 우주의 근본도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있고, 이 세상 모든 살림살이도 다 내 마음에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공생, 공심,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그대로 여여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몸은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해서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히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 모두에게 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체를 알지 못하고는 남의 마음도 모릅니다. 입력이 돼서 자꾸 현실로 나오는 거를 나오는 데다 다시 맡겨 놓는 것이 재입력하는 것입니다. 앞서 입력된 거를, 녹음했던 것을 다시 다른 것으로 녹음한다면 앞서 녹음됐던 것이 무산돼 버리죠. 그와 같은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작용하는 것도.

도둑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난다거나 사기를 치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스려서 그러지 않도록 다시 그 자리에다가 놓는 겁니다. 맡겨 놓는 겁니다. 선행을 할 때는 선행을 하는 대로 감사하게 ‘선행하게 해서 감사하구나!’ 하고 거기 또 놔야 합니다. 그렇게 양면을 다 놓으면서 믿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구한다면 아주 진실하게 깨달음의 소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계의 50%와 물질계의 50% 양면이 작용이 돼야 에너지가 나온다는 얘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아무리 물질계의 50%에서 지금,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모든 거를 다 충족시키려고 해도 그건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50%가 마저 같이 작용을 해야만이 에너지는 충족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뭐, 삼재가 들었다 뭐가 들었다, 이거는 혼란이 많이 오는데, 어떠한 애고가 왔든지, 예를 들면 이사를 잘못 간다는 문제도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모든 것은 내 한마음에 달려 있으니까 주인공에다 맡겨 놓고 그저 내 가고 싶은 날 이사 가면 되고, 삼재가 들었다 하면은 삼재가 들었다는 것도 관습입니다. 관습에 의해서 모든 점을 그르치는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잘못돼서 들어오게 되면 ‘잘못되는 것도 내 주인공에서 나온 거니까….’ 나로 인해서 온 거 아닙니까? 하여튼 내가 없다면 부딪칠 것도 없으니까 내가 있는 반면에 오는 거니까 ‘바로 내 안에서 나온 거니 내 안에서 해결을 할 수 있다.’ 하는 그 믿음과 물러서지 않는 진실을 가지고 맡겨 놓는다면, 나를 발견하고 실험하기에 아주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재료로 알고, 내가 괴로운 데서 괴로운 것을 해결할 수 있어야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실험을 함으로써 체험이 되고, 체험을 함으로써 그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데

질문 제가 처음에는 큰스님의 가르침 받들어 그대로 닦아 나가다 보니 한 2년간은 참 생동감 있게 해 나갔는데 그 뒤로부터는 별 진전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병이 왔을 때 관한다고 하는데도 해결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어찌 보면 좀 바보 같고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데 저한테 어떤 잘못이 있는지요.

답변 아이고 참 내!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글쎄, 어떻게 그렇게 답답해요? 아니, 사람은 마음과 육신이 작용을 하죠? 몸만 있고 마음이 없어도 안 되고 또는 마음만 있고 몸이 없어도 아니 되고 이러죠? 그렇죠? 그러면 생사윤회라는 게 ‘죽는다, 산다’ 이 양면이 없으면 진리가 아니죠? 생산이 되고 멸하고 이러는 양면이 없으면 진리라고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요런 거를 요렇게 해 봤는데 잘됐다, 잘되다가 안된다 그러면 안되는 것도 그 되는 데서 또 안되는 게 나온다는 거를 아셔야죠.

이거 보세요. 부산을 향해서 차를 몰고 갔는데 부산에서 더 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갈 자리는. 그러면 부산에서 되올 줄을 알아야 되는데 거기서만, 막힌 그 종점에서만 다시금 또 그대로 밀고 가려고 하니 그게 됩니까? 한번 스르르 돌려서, 굴려서 다시 오고 가고 하는 작용을 스스로 돌려야죠. 그렇게 됨으로써 이게 ‘어! 잘되는 거를 알려 줬으니까 안되는 것도 법이다 하는 거를 이제 가르치는구나. 그러니 그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라면 그냥 되게끔 할 수도 있잖아?’ 이렇게 굴릴 줄 알아야 된다 이 소립니다. 굴릴 줄 알아야 된다! 기계도 가다가 선 것을 굴릴 줄 모르면, 운전을 못하면 차가 안 갑니다. 인간도 역시 그렇습니다.

용이라는 게 별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그저 주인공에 놓으라니까 그냥 놓고만 가고, 뭐 바보 같고 그렇다 그러지만 왜 바보 같습니까? 얼마나 부처님께서 묘하고 광대무변하고 똑똑하게 가르치셨는데 아니, 바보같이 왜 삽니까? 왜 바보같이 삽니까? 하하하…. 할 일을 다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해라’ 이런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저 나무도 뿌리로부터 몸이 있고 가지가 있고 잎새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꽃을 피우고 과일을 열리게 합니다. 과일들도 제 나무에서 열린 과일이라야만이, 그리고 제 나무에서 익은 과일이라야만이 제 맛을 내는 겁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불법이라는 거는 한 나무에 열매 하나가 열리면 만 가지 맛이 난다는 그 맛을 알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에 그렇게 바보같이 살지 말고 정말이지 자유스럽고 똑똑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털어 버리려면…

질문 사주팔자라는 것이 정말 있는지요? 며칠 전에 흥미로 사주를 본 적이 있는데요, 가벼운 기분으로 보았지만 안 좋은 말을 들어서인지 계속 그 말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털어 버리려고 해도 어느 순간 다시 불쑥 생각이 나고 조금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주인공이 하는 것이고 사주팔자를 본 것도 주인공의 장난이니 주인공에 되맡겨 놓으면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진실한 믿음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인공에 놓으려고 해도 주인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금세 다시 걱정하는 마음이 되곤 하는데 저 스스로도 자신이 답답하고 어리석다고 여겨집니다. 불안한 마음을 털어 버리고 편안한 마음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는지요.

답변 어떤 분은 이사를 가야 하는데 북쪽으로 삼살방이 들어서 계약은 해놓고 못 갔다는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삼살방이 들어서 집안이 잘 안되고 누가 죽는다고 그랬답니다. 또 누구는 어디로 이사를 가면 가환이 떠나질 않는다, 너는 내년에 꼭 죽을 사주팔자고 삼재가 들었으니까 꼭 잘못될 거다,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미약하고 약했으면 자기가 인간이 되기까지 그토록 애를 써서 고귀한 생명을 형성시켜 가지고 이렇게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에 흔들리고 자기로 살지 못하고선 남의 말에 따라서 그냥 휘휘 돌아가야 합니까. 그거는 그 사람들의 노예지 자기 스스로 사는 참사람이 못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일상생활을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우환을 면치 못하고 생사윤회를 면치 못하고 끄달리기에 급급한 삶을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넓어질 수도 없고 물리가 터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집안은 가난하고 항상 오락가락 융합이 되지 않고 한마음으로 돌아가질 않고, 자식은 자식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친척은 친척대로 돌아가고…. 이런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모든 거는 자기가 지어 놓고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우리 인생을 누가 갖다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 가지도 못합니다. 자기들이 지어 놓은 것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녹여야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나가 제가끔들 살아나가는데, 그래서 혼자 왔다 혼자 가는데 서까래 공덕으로서 자기의 뿌리이자 씨가 있기 때문에, 영혼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뼈를 빌리고 어머니의 살을 빌려서 이 세상에 탄생을 해서 인간의 됨됨이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나가느냐 하는 것에 달렸습니다. 그러한 모든 문제를 말입니다, 얽히고설켜서 돌아가는 그 인연을 어떻게 녹여야만 하겠습니까? 이거는 물질로도 안 되고 돈으로도 안 됩니다. 이거는 마음으로 지은 거니까 마음으로 녹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공부를 해라. 기복으로 나가지 마라. 바깥에서 그 많은 이름을 찾지 마라.” 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름 없는 이름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엄마로도 이름이 쓰여지고 형님으로도 쓰여지고, 때에 따라서는 며느리로도 쓰여지고 딸로도 쓰여지고, 또 아내로도 쓰여지고 동생으로도 쓰여지고 누이로도 쓰여지고 갖은 각색으로 이름이 쓰여지는데, 어찌 같은 한 이름만으로 이루종차 부를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그러면 부처님이다, 관세음보살이다, 미륵보살이다, 용왕이다, 조왕이다, 신장이다, 이게 한 사람의 마음에서 그 이름이 다 나가는 것을 어찌 그 이름을 일일이 이루종차 부르면서 타의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생활 불교이면서 생활의 진리이면서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났다면 어디까지나 이것은 인간 삶의 과학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연구하면서 또 계발하면서 나가는 것이 진실한 과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이라고 누가 이름을 지어 놨는지 이름을 지어 놨기 때문에 그 이름이 과학이지,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것도 바로 마음에서 계발을 하고 나갈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써 생활을 융통성 있게, 자유스럽게 해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무루와 유루를 한데 합친, 바로 으뜸가는 과학적인 우리 살림살이일 겁니다. 그런 과학의 삶을 어떻게 내가 주인이 돼서 이끌어 가야 할지를 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숫자 없는 숫자의 진실

질문 큰스님 법문 중에 “무슨 육근(六根)이 어쩌니, 육진(六塵)이 어쩌니, 육식(六識)이 어쩌니, 십팔계(十八界)가 어떠니 이러한 문제를 들고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마음과 마음이 와짝 붙으면 불이 들어올 뿐이죠.”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수십 년 불법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이 법문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법의 자리에서 숫자 아닌 숫자를 말씀해 놓으셨는데, 저는 평생 백지의 뜻을 모른 체 문자와 숫자에 빠져서 진리를 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분별된 문자와 숫자에서 벗어나 백지의 뜻을 알고 제 삶에서 자유스러워질 수 있도록 숫자 없는 숫자의 진실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답변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사대(四大)에 대해서 말입니다, 색(色)은 사대라고 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바로 정신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정신 내용과, 수상행식 그 자체가 사대하고 같이 합쳐지니까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그 몸과 마음은 어디에 또 상대가 있느냐는 얘기죠. 눈이나 귀나 코나 혀나 몸이나 의식 자체, 여섯 가지가 거기에 대두되는 거죠. 요거를 말씀해 놓고 내가 얘기할 게 있습니다. 거기서 대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대두가 됩니다. 그 다음에 뭐가 또 대두가 되느냐 하면, 즉 말하자면 육식(六識)이라고 하는, 결국은 시각적이나 청각적이나 후각, 미각, 촉각, 의식 자체 여섯 가지가 대두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로만, 이론적으로만 나누어서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제 얘길 들어 보시렵니까. 그게 네 가지입니다. 네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 가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개수가 없는 개수를 한번…, 숫자 없는 숫자요. “하나” 하면 몸과, “몸” 그러면 “하나” 이렇게 합니다. 하나라고 치면 육근(六根), “둘” 이럽니다. 내용적으로는 사대(四大)의 그 물질과 사람의 마음이니깐요. “하나, 둘” 하면 이 하나는 과거로 벌써 돌아갔습니다, 예? “하나” 하는 게 벌써 이 몸과 마음은 벌써 과거로 돌아가서, 즉 말하자면 절대적인 요소가 되는 거죠, 이 육근의. 안 그럴까요?

그래서 “둘” 할 때 육근으로 와서, 벌써 이 하나는 여기 포함이 되니까 하나는 없어지고 이게 하나가 (오른손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차례로 잡아 보이시고)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둘” 하는 게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상대성이 절대성으로 들어오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도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육진(六塵)이라고도 하고 육경(六境)이라고도 합니다만 육진으로 다시 들면은 그냥 셋이 됩니다. 그런데 둘이 또 없어집니다. 둘이라는 언어가 없어지면서 셋으로 갑니다. 셋으로 가는데 이 셋은 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아셔야 납득이 돼서 결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납니다. 육식(六識), 육식으로써 이것을 다시금 혼합을 한다면 십팔계가 되면서 이것도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게 한데 합쳐서 십팔계라고 했는데 십팔계는 무엇을 가지고 그러느냐 이런 겁니다. 십(十)은 언제나 여여하게 돌아가는 그대로를 말하는 겁니다. 팔(八)은 사무 사유(四無四有)를 한데 합친 것을 말하죠. 여러분이 다 마음이 있죠. 여러분이 있으니까 있는 거지요. 불성이라는 그 자체가, 불(佛)이라는 자체가. 그것은 항상 움죽거리지 않기 때문에 십팔(十八) 하면 벌써 십구(十九)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언제나 거기 우뚝 서는 거죠. 그래서 사무 사유가, 즉 말하자면 한데 합쳐서 팔로서 팔법륜(八法輪)으로서 (양손 주먹을 바깥쪽으로 굴려 보이시며) 그냥 돌아갑니다. 그게 우리 생활입니다. 십이 진리라고 하면 우리가 응용하는 이 중용은 바로 팔이죠. 이걸 그냥 납득할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냥 내 의견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완전히 벗어난다면 바로 벗어나는 그 자체가, 하나 없는 하나가 그냥 한마음입니다, 한마음. 하나라는 것도 세울 게 없기 때문에 그냥 한마음입니다. 대략 짐작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요걸 비유하건대 만약에 몸과 마음이 솥이라면 바로 거기에는 쌀도 있고 물도 있고 불도 있습니다. 요 네 가지를 또 한번 표현해 보죠. 그런데 쌀을 씻어서 솥에 넣습니다. 물을 붓습니다. 불을 올립니다. 그러면 요것이 밥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밥을 먹게 되죠? 그렇죠? 그래서 그 육식(六識)의 깊은 속에까지도 우리가 들어가서 굴러 나와야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이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씻어 넣고 이거니 저거니 하고 이론으로 따져도 스위치를 꽂아서 밥을 다 익히지 않는다면 우리 입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묵조선이니 간화선이니 하는 것도 그게 둘이 아니건만 불 질러서 밥을 하는 과정과 딱 먹는 거와 혼합이 돼서 하나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지지 말자 이겁니다, 싸우지 말고. 과정을 다 해서 솥에 넣고 스위치 딱 누르면은 밥이 되는 그런 거하고 또 갖다 씻어 넣는 과정하고 뭐가 다릅니까, 예? 그러니까 지금 밥을 해서 먹는다, 불이다 그런다면 우리가 솥에 그냥 하나 갖다 넣으니깐 또 하나 줄어들고, 하나 갖다 넣으니까 또 하나 줄어들고 다 넣고는 불 꽂으니깐 다 먹는다. 이것을 지금 배우는 겁니다. 스위치 꽂아서 밥해서 그냥 먹는 걸 배우는 겁니다. 그 과정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 모든 분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거기다 그냥 넣었으면, 한 솥 넣었으면 그냥 불 꽂아서 해 먹는 거를 우리가 배우자. 우린 시기가 있고 바쁘다. 우리 몸뚱이가 살아 있을 때에 이 뜻을 모른다면 천년만년 가도 이 윤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겁니다. 고(苦)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하나 넣어도 하나요, 하나를 또 넣어도 하나요, 그래서 한 솥을 밥을 해 놓고 먹어도 그 하나마저도 없더라. 모두 나눠서 먹으니까 말입니다. 그 하나마저도 없더라. 그리고 또 갖다 넣은 것도 여러 가지 재료가 같이 들어갔는데 어떻게 불만이, 불만이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이 나다’ 할 수가 없이 그것이 바로 한마음이요, 그 한마음마저도 집착을 하지 마라. 이거 될 때에 너라고 할 수도 없고, 쌀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고, 불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고, 솥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한마음의 찰나 생활이 그대로 역력히 돌아가고 있으니 여러분이 그대로 자유스럽게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기르시라 이런 겁니다.

또 우리가 생각을 해 보십시다.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했습니다. 그러면 계향, 정향 할 때에 벌써 이건 하나 없어집니다, 자꾸. 절대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절대적” 하다 보니까 상대성 원리가 원형으로 모이면서 하나가 탁 일어서는 거죠. 그러니 이것을 비유해서 얘기하니까 참작해서 잘 들으시고요, 나를 무기력하고 무질서하게 얘기한다고 그러진 마시고요. 어떡합니까. 세상 사는 게 부처님 법이요, 그것이 진리니깐요. 그리고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우리가 알아듣기 쉬워야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열 마디 백 마디 해야 그건 쓸데없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해탈향까지 가서 해탈지견향, 즉 말하자면 소견으로 쓰지 않고 그때는 지혜로서의 지견으로 쓰게 된다 이겁니다. 깊은 속에서 굴러서 나와서 하나로 뭉쳐 돌아가니까. 그래서 ‘해탈지견향’ 했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은 계율을 지키려고 안 해도 그게 포함된 그런 능력의 중용이기 때문에 계(戒)를 안 지킨다 지킨다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유의 법에서만이 질서 정연하게 해 나가는 게 아니라 무의 법에서나 유의 법에서나 일체 사생(四生)의 그 뜻을, 생각이 없는 중생이나 생각이 있는 중생을 다 포함해서 리드해 나갈 수 있고, 또 바로 나로 될 수 있고 그로 될 수 있어서 자유권을 그대로 상실하지 않고 자재한다 이 소립니다. 그것이 열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가 하나가 아니라 셋이 하나고, 셋이 하나인데 또 하나가 셋이 되고, 또 하나가 아홉이 되고 아홉이 셋이 되고 이러한 요소가 바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냥 한번 당겨서 극치적으로, 즉 절대성으로 놔두었다가 상대성으로 옮겨 놓고, 옮겨 놨다가 또 절대성으로 오고 상대성으로 가고 이렇게 자유권을 자유자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인간이라고 하는 거고 자유자재하는 자유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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