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가상현실 통한 불교이론 재검토

최근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IoT, 스마트시티, 3D프린팅, 인공지능(AI), 로봇, 무인운송수단 등의 새로운 기술들이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예측이 종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4차 산업혁명시대의 변화를 앎이라는 영역으로 바꾸면, 정보의 무제한적인 소통이 가능하게 되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불교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향의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의식이 변화하는 가운데 어떤 식으로 불교를 전달해야 할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인간소외의 문제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어떻게 확립해야 할지, 새로운 기술을 불교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등 다양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가상 경험은 진짜 경험일까
찰나멸, 인공 생명으로 입증
디지털 신호, 인식에 맞춘 세계
인과 효력으로 허위·진위 가려

필자는 우선 앎의 영역에서 ‘무엇을 새롭게 알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밝혀나가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을 알 수 있을지에 대한 진단이 확실하게 정립되어야 향후의 대책에 대해서도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예시로, 우선 이 글에서는 가상현실로 불교철학을 재검토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한다.

취리히 예술 대학의 맥스 라이너 교수는 버들리(Birdly) 프로젝트를 통해서 가상현실에서 새가 나는 것과 동일한 체험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방법들을 고안하였다. 여기서 고안된 장치에 올라서서 HMD를 착용하면, 실제로 새가 나는 것과 같은 자연 풍경을 보면서 팔을 움직이는 것과 연동하여 날개가 움직이는 효과를 느낄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좀 더 발전된 형태로 발전한다면, 이를테면 새처럼 멀리 볼 수 있고 야간에도 적외선을 감지하여 땅위의 동물들을 볼 수 있게 되고, 포식자들을 실감나게 재현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은 새들의 삶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얻은 이해는 진짜 지식이 될 수 있을까?

가상현실을 활용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테러나 전쟁 현장을 재현하여 사람들에게 체험하도록 하면, 반전운동이 활기를 띄게 되리라고 제안하는 사람도 있다. 살고 있던 마을이 폭격을 받고, 사람들이 죽고, 정처 없이 피난을 떠나는 체험을 ‘진짜처럼’ 하고 나면 누구도 전쟁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얻은 체험은 자신의 진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들을 상상할 때, 가상현실에서 진짜 경험도 가짜 경험도 아닌 중간쯤에 해당하는 경험이 있는 것 같은 혼동을 겪게 된다. 또한 애초에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것이 불합리한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과연 가상현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불교에는 찰나멸(刹那滅)이라는 교설이 있다. 삼계(三界)의 모든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들이 매 순간 발생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불교논리학파에서는 찰나멸이 제행무상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이 찰나멸을 증명하고자 수없이 많은 논리들을 생산하였고, 수많은 논쟁을 거쳤다. 찰나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생각은 어떻게 우리 몸이 매 순간에 생멸하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윤회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생명체의 찰나멸을 직접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이 단순한 질문은 마지막까지 해소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오픈웜(openworm) 프로젝트를 통해서 컴퓨터 안에서 인공생명체가 구현되는 작업이 완성되었다. 예쁜꼬마선충(C.elegans)이라는 길이 1mm 정도의 302개의 신경을 지닌 선형동물은 모든 신경지도가 규명되어 많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었는데, 오픈웜 프로젝트에서 이것을 디지털화하여 컴퓨터 속에서 구현한 것이다. 컴퓨터 속의 가상현실은 주지의 사실대로 디지털 신호로만 이루어지고 매 순간 생멸하는 세계이다. 그 속에서 인공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도 찰나멸하면서 생명체가 살아나갈 수 있다는 개연성을 높여 준다. 다시 말해서, 찰나생멸하면서도 생명이 유지되는 사례를 한 가지 획득한 것이다. 이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이 불교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가 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운동’이라는 것도 찰나멸을 통해서 부정하는데, 우리가 사물의 운동이라고 여기는 것은 한 장소의 사물이 소멸하고 다른 장소에 새로운 사물이 발생하는 것이 매 순간 일어나는 것에 대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의가 나오던 당시에는 그런 예시를 보여줄 방법이 없었지만, 컴퓨터 속의 가상현실에서는 눈에 보이는 화면이 모두 그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점에서 그 직접적인 예시가 될 수 있다.

한편, 유식과 찰나멸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논리학에는 인과효력(arthakriya-)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과효력은 기대목적의 달성, 혹은 찰나생멸하는 존재의 효과적 작용으로도 불리는데, 불이라면 태우는 능력이, 물병이라면 물을 담을 수 있는 능력이 인과효력이다. 다르마키르티는 인과효력을 지닌 것이야 말로 참된 존재라고 보았고, 그것을 지니지 않는 것을 거짓된 존재로 보았다. 그는 이를 확장하여 바른 지식의 근거로 삼았다. 예를 들어 ‘저것은 물이다’라고 인식했을 때, 그것이 실제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면 바른 지식을 얻은 것이라고 검증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효력을 통해서 존재를 규정하고 바른 지식의 여부를 판정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생소한 방식이다. 왜 ‘물이 존재하면 물에 대한 인식은 바른 것이다’라는 식으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존재성을 규정할 수는 없는지, 과연 인과효력만으로 바른 인식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지, 인과효력이 확인되지 않는 존재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그런데 가상현실에서라면 그런 의문들이 모두 해소된다. 가상세계는 디지털 신호를 우리의 인식에 맞춘 개념화된 세계이며, 허위의 세계지만 그 세계 안에서의 인식에 진짜와 가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도 착각이 있을 수 있고, 정확한 인식도 있을 수 있다. 가상현실에서 칼에 베일 수도 있고, 장애물에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가상세계의 사물들이 진짜 사물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경우 가상세계의 허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인식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그 기준을 인과효력에 두는 것이다. 애초에 가상현실에서 보이는 화면은 ‘정보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에 맞춰 조절된 것이다. 우리가 화면 속의 사물이 모두 거짓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가상현실을 바라보는 입장은 유식의 견해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과 유사하다. 가상현실 속에서의 골프채는 ‘공을 날리는’ 인과효력이 있으며, 그런 효력이 있을 때 ‘골프채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가상현실은 인과효력을 지닌 것만이 존재로 규정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유식의 입장에 선 불교논리학에서 규정하는 세계와 동일한 정의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가상현실은 ‘감각 인식의 허위성’과 ‘인과효력을 통한 진위판별’이 공존하는 세계라고 재정의할 수 있다. 가상현실에서 ‘칼’을 봤을 때, 그것이 물건을 베는 능력이 없으면 ‘칼’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며, ‘칼’에 대한 인식은 틀린 것이 된다. 따라서 다르마키르티의 ‘인과효력’ 개념은 가상현실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상현실에 대한 인과효력 개념의 유용성을 통해서 인과효력이 유식의 입장을 드러내는 데에도 효과적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유식의 입장, 혹은 좀 더 확장하면 연기론적 입장에 서면서도 현실에서 인식을 통해서 획득한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제시된 것이 인과효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버들리 프로젝트를 통해서 얻은 새에 관한 지식이나 가상현실을 통한 전쟁 체험이 진짜 지식이 될 수 있고 진짜 경험일 될 수 있는 근거 역시,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기준을 현실과 가상여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과효력에 둘 때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가상현실을 활용하여 불교철학을 해석할 때, 불교 이론의 개연성을 확보하거나 불교의 모호한 개념들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술 발전에 따른 인간 인식의 변화는 그것을 활용하기에 따라서 인간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과 함께 새로운 비유, 새로운 사고실험의 장을 마련해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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