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치 허련의 편지

소치 허련의 1841년 10월에 보낸 초의 스님에게 보낸 장문의 문안 편지. 세로 116.8cm, 가로 24.6cm될 정도로 길다. 안에는 당시 대흥사의 사중 상황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있다.

1841년 10월에 보낸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3)의 편지는 세로 116.8cm, 가로 24.6cm정도나 되는 장문의 문안 편지이다. 이 편지에는 대흥사 사중에서 산소 가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잘라 관에 추증이 되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초의차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뿐 아니라 대흥사 사중에서 만든 차품이 “지난번 연영으로 보낸 차는 비록 스님께서 친히 감사하여 봉한 것은 아니지만 차품이 깨끗하고 맛도 맑습니다. 관찰사(使家)에게 칭찬을 받을 만하고, 드러난 공으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만한 차품”이라고 한 점이다. 당시 대흥사 사중에서 생산되는 차품의 질을 짐작하게 하는 이 편지는 이와 같이 시작된다.

당시 대흥사서 松楸 잘라 물의
“해결위해 초의차 필요” 조언해
대흥사 차 품질 가늠하는 단초
소치 소장 중요자료 초의에 맡겨
둘의 깊은 관계 확인할 수 있어


지난 번 연영빈사(蓮營賓舍:진도 우수영)에 있을 적에 문안 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남평 등지로 떠나신다니 편지를 열어 보았지만 만난 것만은 같지 않으니 슬프고 상실된 마음엔 그리움이 같습니다. 삼가 가을인데 묵은 초가집을 살피지 못해 (가을)풍경이 쓸쓸합니다. 이런 때에 스님의 자취는 더욱 청중(淸重)하신지요. 지난 번 남평에 가신 후, 그 사이 과연 평안히 돌아오셨으며, 소망하신 바도 다시 원하시는 것과 같이 되셨는지요. 그립고 간절한 마음을 그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곧 바로 연영의 관청에서 돌아왔으며, 어제 부모님의 제사 날이었습니다. 추모하는 마음이 애통하고 슬프고 망극합니다. 하물며 멀리 한양에서 노닐다가 4년 후에야 비로소 제사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더욱 더 애통하여 마음을 다 고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를 견주어보면 아이의 손을 잡고 산으로 들어가 겨울 내내 결과를 배치하면 헤아림이 있을 듯합니다. 무릇 모든 일은 뜻과 같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숙부의 병환이 이 즈음에 매우 급박한데 잠자리 문안 인사와 음식 드시는 것을 살피는 일은 원측(遠側)에서는 할 수 없으며, 이 몸도 골골(汨汨)대니 이 복잡다단한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또 출입하는 관가는 친하기도 하고 친압 당하기도 하지만 매일 상종하여 서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희망하는 것이 있으니 단연코 무리해서 어긋나는 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연성(蓮城)에서 편지를 보내 서로 부르고 매영 전역에서 오라고 요구하니 모두 부득이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아마 연말 즈음에 집안 아우가 임지로 가기 때문에 구구한 곳을 털어 내거나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조용한 절을 찾아가거나 유유풍월은 더욱 이런 한가한 일이랴. 제 처지는 혀를 찰 상황이니 더 탄식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암자에 임시로 보관한 행장과 서급(書?)은 부득이 다시 맡아 주셔야하는 상황이고, 연아(蓮衙)에서 전담으로 부리는 관노에게 곧 이 물품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서급에 ‘망수친수개무(望須親手開撫)’ 열 자는 끝을 봉하여 단단하게 묶고, 또한 도장을 찍어 두어야 반드시 소우(?虞)하는 폐단이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고악부> 1책, <쇄금단벽> 1소책, 이런 서책 등은 글맛이 풍부하고 아취가 있어서 반드시 책 상자를 가득 채워 보내주시고, 함 속에 당나라 사람이 그린 <홍, 백매> 사이에 섞여 있는 <주련> 1축과 먹으로 그린 <송죽 주련> 1쌍, <추사선생왕복서편장첩> 1책은 귀합니다. 이것은 즉, 비루한 화공이 이 법을 오로지 익혀서 일가를 이루고자하면 법첩을 소지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모두 단폭(斷幅)에 소지(小紙)의 글자 또한 큰 글자와 작은 글자가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빠진 어느 간독첩(簡牘帖)은 다만 주의가 고아하여 읽을 만할 뿐 아니라 또한 서행(書行)의 성글고 빽빽함이 마땅함을 얻었으며, 처음과 끝이 차례가 있으니 한번 익혀보고 한번 베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울러 인색하게 하지 마시고 반드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비록 욕심이 많으나 결단코 그런 중에서 염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남을 헤아리는 것을 어느 때나 얻을 수 있을까요. 꾸짖어 주십시오.

지난번 연영으로 보낸 차는 비록 스님께서 친히 감사하여 봉한 것은 아니지만 차품이 깨끗하고 맛도 맑습니다. 관찰사(使家)에게 칭찬을 받을 만하고, 드러난 공으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만한 차품인데 가깝게 하기에는 부족하며, 이 한포 차로는 만족스럽지 않아 애석하게 여깁니다. 또한 들으시고 해결하여 주실 런지요.
과연 한 가지 일로 말하고자 한 것인데 몸소 친히 접할 수 없으니 소홀한 듯합니다. 그러므로 집안에 둘째와 막내아우가 내년에 임지를 얻을 상황인데 한번 도서원에 견주어 보고 한번은 균역색을 헤아려보면 목하 납부해야하는 비용은 거의 5백 여 금이니 백지 상태에서 만은 만드는 일을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년에 면포세가 극심하게 부족한대 전정(錢政)이 극히 귀해 입수(入手)할 방법은 거의 거북 등을 긁어 털을 얻는 것처럼 널리 찾아도 많이 구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 친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입을 벌리겠습니까. 만약 큰 절에서 여러 곳에 물어 구할 수가 있다면 백량 정도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 십분 상량하신 후 빌려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아우를 보내 가져오는 것을 주선하겠습니다. 나무 잎에 부는 바람처럼 듣지 마세요. 세세히 헤아려 알려주십시오.

심적암 성묵 스님이 일찍이 차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이 편지를 급히 아이에게 보냅니다. 답신을 받으신 이래 노전 명적에게도 이 편지로 안부를 전하니 급히 전해주세요. 양호당에게 보낸 편지는 과연 글 중에 소설이 많으니 이는 스님께서 미황사 사중에 계시지 않는다고 들었고 다른 암자에 이리저리 머무신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인편에게 편지를 보내주십시오.

지난번 우수영에 있으면서 쓴 편지 중에 놀랄만하고 괴이하게 여길 만한 법당이 있다고 했는데 배의(排議)을 짝할 무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소나무를 해친 것은 단지 소란하게 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영읍의 도움이 약간에 있다할지라도 승가에서 답하고 행하는 것을 보면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으로 행하여 송추(松楸, 산소가에 심은 소나무)를 함부로 잘랐고 해변은 엄하게 금하는 것인데 이처럼 함부로 하였으니 약간의 무리들이 결코 마음먹은 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결백을 밝혀야할 때입니다. 하루 저녁 서로 마주 보고 대화를 하게 되면 대수롭지 않게 큰 절의 폐막(弊?)에 이를 것입니다.

또 모모(某某) 승려가 저지른 폐단을 말하며 대화가 의아해짐을 넘어서게 되면 이 때에 제가 답을 이와 같이 하여 의도대로 화제가 돌아가면 막원 중에 친한 자와 하루 밤을 동침하며 저간의 물음을 세세하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처음 알게 될 것이고 알게 된 후에야 제가 주선하는 것이 오히려 어떻겠습니까. 이런 사이에 만약 스님이 법제하신 차를 소개한다면 마침내 전사(專使)가 들어 줄 것입니다. 반드시 자리를 마련하여 조용하고 화기애애하게 얘기해야 합니다. 대개 저런 일은 심려하지 마세요. 맡기시고 한번 웃으시오.

이 사이에 시를 지은 것은 어느 곳에 상증하셨습니까. 이에 보냅니다. 허물을 지적하시어 깎아내고 비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붉어진 얼굴이 더 붉어질 뿐입니다. 말이 길어져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1841년 10월 13일 창부 허류 배수

제주도 행차는 바람이 또 더욱 높아져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일에 매었더라도 따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운산을 면했지만 또한 세상의 물정이 한탄스럽습니다. 

向在蓮營賓舍 探討候書 而適値離錫於南平等地 未得開緘如對 ?失之懷 想一般矣 謹不審秋老?屋 景物蕭索 此時道履 益復淸重 向之南平行 間果穩還 而所望亦復如願耶 溯仰憧憧 不能已也 ? 直自蓮衙得還 昨逢親忌之日 追感之慟 慨罔極 而?遊散遠洛 四載後始參祭班 益復哀痛 情不盡喩 準擬此時携兒入山 三冬結課排布有量矣 凡百事 爲多不如意之計 叔父病患 際此孔劇 問寢視飮 未得遠側 此身汨汨 何若是多端 又是出入官家 見親見狎 不許相離於日日相從 此中則有所希望者 斷不可强違之地 而蓮城之貽書相招 梅營之專驛要來 俱係不得已之勢 然蓋由於歲末 家弟所任事之故 未得擺脫於區區之地矣 ?尋入蕭寺 優遊風月 尤是等閑事乎 身勢?? 益歎何益 庵中任置行裝書? 不得已還擔以來之勢 而自衙中專使官隸 方此委送耳耶 書?望須親手開撫十字 緊纏封末 又着套書 必無?虞之弊 而古樂賦一冊 碎金斷璧一小冊 此等書書味艶雅 必爲充?以送 貴函中 唐人畵紅白梅間雜柱聯一 墨畵松竹柱聯一雙 秋史先生往覆簡牘裝帖一冊 此則鄙之書工 專肄此法 期欲成家 而所持法帖 皆斷幅小紙 字亦大小無理 不歸一統 此是所欠 簡牘帖 非但做意之高雅可讀 且書行?密得宜 頭尾有次 不可不一番肄習 一番謄傳 ?須勿?必送也 鄙雖多慾 決不無廉於其間 ?人何會得耶 相呵相呵 向之蓮營所送茶物 雖非師之親手監封 品潔味淸 見稱於使家 奪人見功 有近?然 這一苞茶 無足爲惜矣 且聽下回解得也 果有一事所欲言者 而身未親接 近於?虞 然家弟仲季 必爲明年得任之勢 而一擬都書員 一擬均役色 目下所入之費 幾爲五百餘金 其做事白地萬不成說之中 今年綿?之致 錢政極貴 入手之道 殆若括龜 不可不廣覓多求 皆非親知 何必開口 若於大寺數處問媒 則限百兩 或可貸得耶 十分商量後言及 則當委送家弟 以爲周旋矣 勿以過葉之風聽之 細量示之也 深庵性默堂 曾有茶物所約事 有此書封 必急送兒 受答以來 而爐殿明寂 書皆問訊 必急傳 朗湖堂邊所去書 果有書中多小說 而其師聞不在美寺中 流寓於他庵云 必隨便信傳也 向在水營作書中 有可驚可怪之法堂 排議不群 而松木之亂犯 不可但以駭然論 雖有營邑之許助 看作僧家之應行 憑公行私 亂斫松楸 海邊重禁 若此蔑然 若箇輩 決不可尋常處之 方欲發廉之際矣 一夕陪話於對軒之次 尋常語到大寺弊? 且說某某僧之作弊 語涉疑訝 伊時鄙答若此 若此歸語 幕員中所親者 同枕一夜 細細諸問 然始爲得知 而得知之後 鄙之周旋 ?如何 於斯之間 果以法製茶品紹介 竟有專使之擧矣 必待逢席穩討矣 大?如彼 而休勿爲慮 付之一笑也 此間題? 相證何處 玆以奉呈 指摘瑕疵 斤削批評之地 如何如何 醉顔添?而已 語長不審禮 辛丑 陽月 十三日 ?夫 許? 拜手
瀛上之行 風又値高 想必未能矣 雖係事爲末由焉 得免雲山 亦世情之歎也

소치의 편지에는 대흥사 사중에서 무덤가에 자란 소나무를 벤 일로, 관청의 조사를 받아야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초의는 아마도 소치에게 이 일을 상의한 듯하다. 그러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초의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피력한 소치의 언구가 보인다. 특히 소치가 애지중지하던 소장도서와 회화자료를 초의에게 맡겼다는 점도 이 편지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1841년 2월에 추사의 유배지 제주도로 가기 전에 소치의 소장품이 초의에게 맡겼던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이들의 신뢰는 바위처럼 굳건했던 것이다.

당시 대흥사 사중에서 만든 차품의 질을 언급한 자료가 드물다. 이 편지는 이런 정황을 상세히 밝힌 자료인 셈이다. 특히 심적암의 성묵도 차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무렵 대흥사의 다풍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거듭 편지의 중요성을 주목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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