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승삼매선법(염불선)이 초창기 선종에 미친 영향

염불삼매 역시 큰 공덕있어      
실상염불과 유심염불의 합일    
혜가~혜능 모두 염불도 방편으로 

염불선법은 초창기 중국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수행 방편 중에 하나였다. 특히 염불삼매는 대소승의 수행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 각각의 시대를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 했다. 이 염불삼매 수행법은 중국 초창기의 선종은 물론 이거니와 후대 선종에도 많은 영향을 주면서, 선종의 역사와 함께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대승삼매는 염불로 인해서 定(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공통된 주장이다.(여기서 달마선법 내지 중국의 선종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수행과정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당나라 때 도작(道綽)이 지은 〈안락집(安樂集)〉에 보면 “만약에 보리심 가운데 염불삼매를 행하면 일체 악신, 일체 모든 장애가 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으며, 가는 곳마다 모두 장애를 없애고 막을 수 있다. … 이 염불삼매는 일체 삼매 중에 왕이 되기 때문이다.”고 했다.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서도 “일행삼매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용한 곳에서, 모든 산란한 뜻을 버리고, 모양을 취하지 말고, 일심을 놓지 않고 부처님을 염하되, 오로지 명자만 칭하면, 과거 현재 미래 제불들께서 나타나신다.”고 하고 있다. 〈대지도론〉 에서도 “염불삼매는 대복덕이 있다. 때문에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 있고, 모든 보살이 이것으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한다. 모든 나머지 삼매는 이와 같은 염불삼매의 복덕이 없다. 또 모든 죄업을 신속하게 소멸하게 한다.”고 하고 있다. 즉 염불삼매 공덕에 대한 내용으로, 염불삼매도 역시 일반적인 수행과 같이 많은 공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림, 강병호

달마가 전한 선법은 원래는 ‘벽관안심(壁觀安心)’법이다. 때문에 염불삼매와는 크게 다르다. 다만 4조 도신대에 이르러서 〈능가경〉은 물론이거니와 〈문수사리반야경〉을 더 첨가해서 의지했다. 〈문수사리반야경〉은 실상염불을 주장하는데 “이와 같이 일행삼매에 들어가는 자는 항상 제불 법계의 차별상을 모두 안다.”고 설하고 있다. 한편 도신은 〈능가경〉과 〈문수사리반야경〉에서 수립해 제정한 염불방편을 의지하기도 했다. 즉 실상염불(實相念佛)과 유심염불(唯心念佛)의 합일이며, 동시에 염불과 성불의 합일이기도 하다. 도신의 선법의 강령은 ‘심정즉불(心淨卽佛), 불즉시심(佛卽是心)’으로서 후대 선종의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시효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인도안심요방편법문(人道安心要方便法門)〉에서 “나의 이 법요는 〈능가경(楞伽經)〉의 모든 불심이 제일이라는 것을 의지 했으며, 또 〈문수사리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는 곧 염불하는 마음이 곧 불(佛)이고, 망념이 곧 법부이다.”고 하는 것을 의지 했다고 했다. 〈문수사리반야경〉에서 일행삼매(一行三昧)는 염불 삼매의 일종이라고 했다. 실제로 일행삼매는 바로 ‘법계일상(法界一相)’, ‘계연법계(繫緣法界)’이다. 만약에 ‘일행삼매’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법계의 무차별상’으로써 지속적으로 생각(念)을 놓지 않고 성취하는 삼매이다. 즉 도신은 ‘일행삼매’를 달마선으로 도입하였기 때문에 ‘동산법문’의 특색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도신 문하는 대부분 이 특색을 계승하였다. 예를 들면 정중선(淨衆禪)의 무상 스님이 선법을 전개할 때 “먼저 인성염불(引聲念佛)을 가리켜서, 기를 다하고, 염을 끊고 소리를 멈춘다.”고 했다. 즉 염불을 활용한 선법이라는 것이다. 종밀은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에서 당시 중국 선종의 각 지파에 대해서 평론하기를 “북종은 번뇌를 털고 청정을 보고, 방편으로 경전을 통용한다(拂塵看淨, 方便通經)고 했고, 정중종(淨宗)은 삼구 용심으로 계정혜를 삼았다(三句用心爲戒定慧)고 했고, 보당종(保唐宗)은 교를 행하되 집착하지 않고 식을 멸했다(敎行不拘而滅識)고 했고, 홍주종(洪州宗)은 촉하는 것마다 도이기 때문에 마음에 맡긴다(觸類是道而任心)고 했고, 우두종(牛頭宗)은 본래 일이 없고 정을 잊는다(本無事而忘情)고 했고, 하택종(荷澤宗)은 적지는 체를 가리키고,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寂知指體, 無念爲宗)고 하였고, 선습종(宣什宗)은 향을 전하는 것을 의지해서 부처님이 존재한다(藉傳香而存佛)고 하였는데, 선습종을 곧 ‘남산염불산선종(南山念佛山禪宗)이다.”고 칭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석두종의 평가가 빠져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사실 〈단경〉에서도 “만약에 일체처 행주좌와에, 오직 직심(直心)으로 동하지 않으면 도량이 정말로 정토를 이룬다. 이 이름이 일행삼매이다.”고 하고 있다. 물론 이 〈단경〉이 원대에 지어진 종보본으로 이미 많은 첨삭을 당했기 때문에 처음의 의미와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하는 바는 바로 일행삼매의 중요성에 대한 일깨움일 것이다.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오조홍인의 제자들 중에는 정토(淨土)을 수행한 경향이 적지 않다. 〈정토왕생록(淨土往生錄)〉에 보면 “법지 스님은 황매의 홍인 대사를 의지해서 심을 얻었다. … 정토를 가지고, 놓지 않고(계속해서) 염하기를, 9년 동안 모든 행동을 멈추고, 반드시 관상(觀想)만 하였다.”고 하고 있다. 즉 법지 스님이라는 분은 만년에 오로지 정토의 관상(觀想)을 행하였으며 타력 염불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혜가로부터 6조까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달마 계통의 선법을 이었으며, 동시에 염불(念佛) 및 정심(淨心)을 방편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불염불(不念佛) 불간정(不看淨) 등을 주장하기도 하는 다양한 방편을 제시하였다. 즉 타의든 자이든 염불수행은 선종에 영향을 미쳤고, 선종의 역사와 함께 그 발자취를 이어왔다고 하겠다. 또 그 공통적인 목표는 모두 성불이며 해탈 열반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선종이 당대에 이르러서 서서히 도약을 하면서 당대 중엽에 이르러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당대 말엽 오대십국을 거치면서 점점 쇄락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선종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또 다른 변모된 모습으로 역사의 전면이 나타났다. 오대송초의 영명연수가 〈종경록〉에서 선과 정토가 일치한다는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주장을 펼치면서, 이 ‘선정일치’사상은 송대 이후 선종의 역사 발전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 해 주었다. 물론 여기서 영명연수가 주장했던 정토는 역시 타방정토(他方淨土)를 구하는 것이 아닌, 바로 ‘자성미타(自性彌陀)’ 혹은 ‘유심정토(唯心淨土)’를 말한다. 이후 영명연수의 ‘선정일치’사상은 ‘선정겸수(禪淨雙修)’를 통한 수행 방편을 지향했으며, 송대 이후 선종에서 중요한 하나의 과제로서 대부분의 선사들이 ‘선정겸수’를 주장했다. 여기서 몇 사람만 추려서 소개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송대 운문종의 명교계숭(明敎契崇ㆍ1007~ 1072), 천의의회(天衣義懷ㆍ989~1060), 혜림종본(慧林宗本ㆍ1020~1099), 장로응부(長廬應夫ㆍ생몰년대 미상)과 조동종의 진헐청료(眞歇淸了ㆍ1089~1151) 및 임제종의 사심오신(死心悟新ㆍ1044~1115) 등이 선정겸수를 주장하였다. 원대로 오면서 선정겸수 및 선정쌍수를 제시한 사람이 더욱더 많아지기 시작한다. 임제종의 중본명본(中峰明本)을 비롯한 명말 사대 고승들도 또한 선정겸수를 주장 했으며, 청대의 철오선사도(徹悟禪師)도 선정겸수를 주장했다. 특히 근대 허운선사(虛雲禪師ㆍ1840~1959)도 선정겸수를 주장했는데, 그는 직접적으로 연수선사의 사간료(四料簡)를 해석하기를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해지고 곧 자성미타가 드러난다. 이 정토와 선은 둘이 아니지만(淨土禪不二), 오직 지금 사람들은 도리어 염불은 정(淨)이 되고, 참선은 선(禪)이 된다고 구분한다.”고 하며, 또 “선(禪)은 정(淨)중의 선이며, 정(淨)은 선(禪)중의 정(淨)이다. 선과 정(淨)은 본래 상부상조를 행한다.”고 힐책을 하면서, “참선 염불 등 법문은 본래 모두 석가가 친히 설하신 것으로, 도(道)는 본래 둘이 아니지만, 다만 숙생 인연과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응병여락(應病與藥ㆍ병을 대해서 약을 처방한다)의 방편을 삼았다. 방편으로 많은 법문을 시설해서 중생을 교화한다.”고 선정일치를 분명하게 표명하였다. 이외도 천태종 몇몇 스님들도 선종쌍수(禪淨雙修)를 제창하였는데, 예를 들면 지예(智禮), 준식(遵式), 지원(智圓), 종효(宗曉), 원효(元曉), 원조(元照) 등이 있다. 물론 이들이 주장 했던 선정쌍수는 초기 중국불교에서 주장한 ‘염불삼매’ 수행법과는 아주 같지는 않지만, 선정(禪定)삼매를 향한 근본수행은 그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염불을 매우 낮은 근기가 행하는 수행법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이유는 염불 특히 칭념염불(稱念佛名)은 타력을 의지해서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염불을 심천(深淺)의 각도에서 볼 때, 타력을 의지하는 염불은 천(淺ㆍ옅다)하다는 입장이다. 사실 염불이 표면상에서는 타력을 강조하지만, 사실 엄밀히 살펴보면 곧 타력 자력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타력은 곧 자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을 해보면 본인이 열심히 염불을 하지 않으면 타력의 힘(아미타불 혹은 제불보살)이 절대 나타날 수도 느낄 수도 없으며, 최소한 리염(離念) 혹은 무념(無念)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타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타력은 곧 자력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염불도 곧 자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종에서 주장하는 자력을 의지한 수행인 자수자증(自修自證) 혹은 자수자오(自修自悟), 자성자도(自性自度ㆍ스스로 자기를 제도한다)와 큰 차이 점이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