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범람 시대서 ‘나 지키기’ 감각이 나고 사라짐을 관상하는 ‘관무량수경’이 해답 줄 수 있어 극락세계 이미지와 소리 표현은 수행 방해물 아닌 깨달음의 방편 일반 수행과 달리 감각들을 수용 현대를 이미지 범람의 시대라고 한다. 매일매일 사진,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디자인, 광고, 게임, 만화, 유튜브, 인터넷 등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미지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길을 가든 지하철을 타든 스마트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고, 젊은이들은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문자메시지나 디지털이미지를 통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한다. 이제 가상과 진상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보다 더 진짜 같고 더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논리적
유사한 오이디푸스·아사세 설화 세간은 ‘친족 살해’ 주목하지만 ‘앎의 비극’ 메시지 귀 기울여야 인과의 통찰과 감성적 사유 없이 합리성만을 강조한 지식은 한계 자신의 근원 부정하는 모순 가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빈비사라왕과 왕비 위제희 부인,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아사세 사이에서 일어났던 왕사성의 비극을 배경으로 청정한 땅, 정토로의 구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펼쳐지고 있다. 아사세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이라는 소재 때문에 일찍부터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의 유사성이 주목되었으며,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착안한 ‘아사세 콤플렉스’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정신분석학은 두 이야기의 ‘부친살해’와 ‘근친상간’, 또는 ‘모친살해’에 주목하고 있
불교와 도교가 공존하는 명부전 시왕 옆에는 항시 동자상 있어 인간이 가긴 선악의 業을 기록 불교 경전에는 동생·동명신 명시 교리보다 죽음 관련 존재로 인식 사찰 안의 여러 전각 가운데 명부전은 명부(冥府), 다시 말해 저승세계를 재현해 놓은 공간이다. 이곳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자신의 성불을 뒤로 미루고 천상에서 지옥까지 육도의 모든 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위대한 서원을 세운 대원력 대자비의 보살이다. 그런데 왜 지장보살이 명부전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명부전의 원래 주인공은 도교의 신인 시왕들이었다. 조선 초까지 명부전에는 시왕이,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이 주존으로 모셔져 각각 다른 종교적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염라대왕도 그 중 하나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원죄에 대한 고뇌 담아 대상을 객관화하는 표상 옅은 미소가 매력적인? 한국 국보 반가사유상 적멸의 즐거움 일깨워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파스칼 우주 속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전 우주를 능가하는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파스칼이 지적한 것처럼 ‘생각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간은 생각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인 무기를 만들고 자신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연장을 개발했다. 그 덕분에 인류는 찬란한 문명을 건설했으며 이제 그 문명은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복제한 인공지능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사유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모습은 인간만
대상의 정신을 묘사한? ‘신사’ 동양에만 있는 중요 미학 개념 유명 나한상, ‘신사’ 평가 많아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사실과 환상의 경계 미묘히 유지 종교·과학도 사실성 근거는 믿음 ?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예술작품의 비평기준은 “대상을 얼마나 닮게 그리느냐”였다. 예술작품과 그 원본이 된 실제 사물 사이의 관계를 서양에서는 “미메시스(모방)”이라고 하고 동양에서는 ‘似(닮음)’이라고 하는데, 이 개념들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한다. 무엇보다 동양에서는 대상의 외관을 유사하게 그린 것을 ‘형사(形似)’라고 하고 대상의 정신성이나 기운을 생동적으로 그려낸 것을 ‘신사(神似)’라고 하여 구별하고 전자보다 후자를 높이 평가하는데, 서양미학에는 이러한 구별이
시간성 표현한 유일한 도상들 청장년, 노년 모든 세대 표현 노인으로 묘사된 빈두로 존자 미래 부처 도래까지 중생 제도 부처가 없는 세상, 부처의 가르침도 사라져버린 세상을 말법시대라고 한다. 소위 ‘말세’라고 하는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도덕과 정의, 원칙마저 사라진 말세, 어느 누구도 희생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지만 서로서로 쫓고 쫓기다가 죽음에 이르러야 그 쳇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허무하고 냉혹한 현실을 멕시코와 접경지대에 위치한 텍사스 어느 사막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의 현장으로 옮겨놓는다.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우연히 일확천금을 한 사냥꾼과 그를 뒤쫓는 추적자, 그리고 추적자를 노리는 킬러의 숨 막히는 추격전을 그리는
독성, 16, 500나한 예경 예불 칠정례에도 포함돼 중생들 염원 듣는 존재 불보살상 도상 근거 있다면 나한상은 해학적 모습 넘쳐 부처님 “복전이 될 것” 命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부촉 받은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 아라한께 절하옵니다.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弟子 十六聖 五百聖 獨修聖 乃至 千二百 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지만 아침저녁 삼보에 예경을 할 때 영취산에서 부처님의 법을 부촉받은 10대 제자, 십육 아라한, 오백 아라한, 그리고 천이백 아라한에게도 빠짐없이 예경한다. 뿐만 아니라 나한을 위한 전각도 존재한다.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각에는 한분, 열여섯 분, 많게는 오백 분까지 아라한을
東亞 사찰 마당엔 상징이 가득 사찰 정원 또 하나의 산수로 평가 바위, 모래 등 놓은 日사찰 정원 선 강조하지만 결국 인공 조형물 한국 사찰은 자연 그대로를 담아 차경한 절 마당은 ‘비움의 공간’ 작은 뜰의 사물도 불성을 보여 일반적으로 종교건축은 강한 상징성을 갖는다. 욕망으로 넘치는 지상에 성스러운 공간을 만들려면 종교적 상징물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종교건축의 신성함은 그곳에 안치된 성상의 힘에 의지하지만, 발리 섬의 힌두 사원처럼 지상에 강림한 신이 사용하게 될 빈 의자만으로 종교적인 신성함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종교건축은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를 위한 공간으로 고안된다. 하지만 불교건축
서양의 템플은 신 위한 공간 동양의 사찰, 예배·수행 장소 사찰은 폐쇄 아닌 소통 추구 선종 사찰들 자연 환경 중시 삼라만상을 ‘공함’으로 직관 자연은 선적 깨달음의 표현 요즘 템플스테이가 인기이다. 풍광이 좋은 절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스님들처럼 먹고 자고 수행하는 것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그 어떤 치유보다 더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고 회복시키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템플스테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서양에서 ‘템플’은 신전을 말한다. 서양의 신전은 그야말로 신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신전을 지키는 사람조차 그 공간에서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직자를 위한 주거공간도 성소 외부의 별채에 마련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까 ‘템플스테
영취산 설법의 연꽃 한 송이 마하가섭이 미소로 화답해 ‘깨달음의 상징’ 자리매김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 세상 물들지 않는 청정함 비유 동아시아 문학 안에서도 연꽃은 중요한 소재 활용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 서 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엇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꽃으로 장엄된 부처님의 세계, 그 세계 한 가운데에서 가장 빛나는 꽃, 바로 연꽃이다. 불교의 등장 이전부터 인도에서 수많은 신화에 등장했지만, 이 꽃의 거룩한
불교의 서방극락정토 아미타불의 주석처 욕망없이 法悅 가득해 모든 존재 이르는 곳 자리이타 아우름이 불교 미학의 요체 불국정토를 만들려면 자신부터 청정해져야 찬란한 빛의 궁전, 화려한 보배로 장식한 누각, 난간에는 오색 깃발이 펄럭이고 보배로 만든 그물이 일곱 겹으로 드리워져 있다. 금모래가 깔려 있는 칠보의 궁전 연못에는 여덟 가지 공덕의 물이 가득 차 있고 그곳에 갖가지 색깔의 연꽃이 피어 저마다의 자태를 폼 내고 있다. 그곳으로 가는 유리로 된 투명하고 평탄한 길을 걷고 있노라면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보배 나뭇잎 사이로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여의도 윤중제 흩날리는 벚꽃처럼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가릉빈가 등 진귀하고 아름다운 새들이
서양 회화의 ‘해골의 춤’ 죽음은 두려운 것으로 묘사 절대자에 대한 헌신 상징도 한국 불교의 감로탱화 당시 죽음의 모습들을 그려 죽음, 종결 아닌 삶의 연속 지혜로운 이의 삶은 전부가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키케로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로마 시내를 퍼레이드 할 때 노예 한 사람에게 월계관을 들고 뒤따르게 하였다. 이 월계관에는 특별한 문장이 씌어있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생애 최고의 순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날, 노예는 개선장군에게 오늘은 최고의 날이지만 내일 또 다른 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삶은 덧없고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 그런
타종교에 없는 불교만의 조형물 숭배 아닌 청정한 마음의 원력 한국의 석탑 안정감·조화 이뤄 ‘부처의 몸’이라 믿는 우매함 달래 “영겁을 지킨 탑의 침묵을 듣자” “절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듯하다.” 〈삼국유사〉에 묘사된 신라 서라벌의 풍경은 그야말로 부처님의 나라, 불국(佛國)이다. 오늘날 경주에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서도 당시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유독 외침이 잦았던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석탑이다. 그래서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하고,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한다. 전란의 풍화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목탑이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산 많고 돌 많은 이 땅에서는 거친 돌 깎아 석탑을 짓기가
관음의 응신 중 하나 수월관음 온화함의 위엄으로 중생제도 그 앞에서 우린 선재가 된다 화엄경 표현한 불화 수월관음도 고려인은 온 우주가 자비라 생각 나를 관음의 자비로 채워내야 “나에게 있는 관세음보살은 밤낮 의연(依然)하신 관세음보살입니다. 잘난 이에게는 어떨는지, 아는 것 많은 이에게는 어떨는지, 나에게는 관세음보살님이 편안하고 좋은 구제(救濟)의 님이심을 믿습니다. 경론(經論)에서 선록(禪錄)에서 사부(四部)에서 백가(百家)에서 보고 듣고 헤매는 것을 관세음께 다 맡겼습니다. 아니 어느 틈에 맡아 가셨습니다. 불평과 희망과 삼독과 팔난이 남보다 치성하다고 하겠지마는 모든 풍파를 관세음의 회향 중에서 겪으매 불안 그대로가 평안(平安)입니다.” ?-최남선 〈묘음관세음〉 중
험상궂은 얼굴의 사천왕 스스로 ‘僞惡’ 된 배트맨 희생통한 이타적 존재 닮아 “佛法 사칭한 사이비들은 사천왕의 분노 두렵지 않을까”?? 문은 공간과 공간을 가르는 경계이다. 어느 세계에 살든, 가보지 않은 세계는 매력적이다. 문 안쪽의 사람은 문 바깥의 세계를 꿈꾸고, 문 바깥의 사람들은 문 안쪽의 세계가 궁금하다. 세상 사람들은 가문(家門)을, 출가자들은 산문(山門)을 가지고 있다. 용기 있는 자만이 문을 통과하여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이르는 입구 출세간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에 세 개의 문이 있다. 문을 하나 통과할 때마다 마음은 정화되고 의식은 맑아진다. 문이 없는 문, 일주문(一柱門)과 하늘의 문, 사천왕문을 거쳐, 성(聖)과 속(俗)
부처님, 인간과 신 경계 초월 공덕과 자비상징… 대승철학 표현 “삼세의 부처님 지켜보고 있다 수행자들이여 두렵지 않은가” 몇 년 전 기독교 계통의 대학연구소에서 몇 차례 사찰 건축에 대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대학의 채플관이 독특하게 원형으로 디자인되어 있어 함께 공부했던 건축과 교수와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그 분은 이 독특한 설계에 대해 처음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반발했지만, 후에 교회 건축양식으로 알려진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고딕양식이 모두 로마의 건축양식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으로 그 반발을 누그러뜨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교회 건축양식이 로마 건축에서 발전한 것이라는 그 분의
불교는 숭배아닌 귀의 강조 법신은 부처님 법 계승 의미 불상·불탑 귀의 위해 제작 불상의 진상·가상 이중주 속 청정한 허공의 몸을 보리라 모든 종교에는 입문절차가 있다. 불교에도 불자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입문절차가 있다. 최근 조계종에서는 불교대학 기본과정을 이수해야 신도증을 교부하도록 규정하는 등 불교 입문을 위한 형식들을 만들고 있지만, 불자가 되려는 사람이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삼귀의(三歸依), 부처님과 그 분이 가르친 법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귀의하는 것이 불자가 되기 위한 기본 요건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불교에는 형식적인 입문절차가 없다. 출가자를 위한 입문의식인 수계의식과 절차가 율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부처님 재세
불상, 종교적 감성 더하는 예술품 부처의 미소 통해 불교 핵심 표현 이 시대 수행자는 어떤 얼굴인가 진정한 부처 찾기위해 관념 넘어야 언젠가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분이 물었다. “스님, 이 사진 보세요. 어떻습니까?” “글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그 분이 말씀하셨다. “이 얼굴이 평화로워 보입니까? 아니지요. 고통으로 찌들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사진 속의 인물은 굵게 파인 주름살에 약간 딱딱해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테레사 수녀의 사진이었다. 가난한 사람의 성자, 불행한 자들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는 이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예경의 대상이었던 불상 박물관 예술작품으로 소구 종교와 예술의 갈림길서 종교의 미학화 경계할 일 1902년 8월 청년 릴케는 로댕에 관한 논문 집필을 의뢰받고 파리에 도착한다. 로댕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는 로댕으로부터 사물을 깊이 관찰하고 규명하는 법을 배운다. 로댕의 정원에서 릴케는 특이한 조각품 하나를 만난다. 바로 붓다의 이미지, 불상이다. 불교에 대한 릴케의 생각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원래의 종교적 맥락을 잃고 조각가의 정원에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진열되어 있는 불상 속에서 어렴풋이 남아있는 초월적 성스러움을 이렇게 읽어낸다. 붓다 Buddha 이미 멀리에서 이방의 겁먹은 순례자는 느낀다. 그에게서 금빛이 방울져 떨어지는 것을. 마치 회심에 찬 부자들이 그들의 은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