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문명을 구가하던 당조(唐朝)는 안사(安史)의 난 이후 점차 쇠락하게 되는 시기에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은 오히려 천하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것은 파촉의 성도(成都)에서 신라 출신의 무상(無相)이 피란한 현종(玄宗)의 귀의를 받았고, 하택(荷澤) 신회(神會)가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데 절대적인 공로를 세웠으며, 남양(南陽) 혜충국사(慧忠國師)가 숙종(肅宗)과 대종(代宗)의 귀의를 받아 제도(帝都)에서 18년에 이르도록 교화했던 것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으니, 모두 혜능의 문하이기 때문이다.이 시기에 강
당대(唐代)는 개방적인 정책으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양경(兩京)에는 서역 등지와 동아시아 제국에서 온 외국인이 십만 명이 넘게 머물러 있었으며, 중국의 각지에서도 인재들이 몰려들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문명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755~763)은 한순간에 중국을 쇠퇴하게 하였다. 송대(宋代)에 찬술된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안사의 난으로 인하여 “몇 년 동안 천하의 호구(戶口)가 10에 8, 9가 없어지고, 주현(州縣)들이 대부분 번진(藩鎭)에 점거당하여 공부(貢賦)가 들어
동산법문(東山法門)의 홍인(弘忍)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제자가 제도(帝都)로부터 중국 각지에서 활동하면서 그 위상을 높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동산법문이 당시의 불교를 장악했음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에 따라 신라나 고구려 출신의 승려들이 동산법문에 귀의한 경우가 보인다. 도신(道信)의 법을 계승한 신라의 법랑(法朗)이 있으며, 홍인의 ‘십대제자’ 가운데 고구려 승(僧) 지덕(智德)이 거명된다. 법랑은 최치원(崔致遠)의 ‘지증대사비명(智證大師碑銘)’에서 언급하고 있어 알려져 있고, 지덕은 홍인의 ‘십대제자’에 속하였기 때문
동산법문(東山法門)은 당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창립자인 도신(道信)의 선사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도신의 선사상은 수대(隋代)로부터 불교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천태학(天台學)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새로운 사상적 관점에서 ‘오문선요(五門禪要)’로 제창하였기 때문이다. 천태학은 남북으로 2백 년이 넘게 분열되어 발전한 불교학을 모두 종합하여 ‘오시팔교(五時八敎)’로 통섭(統攝)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한 교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도신의 ‘오문선요’는 가장 긴요한 선요(禪要)만을 제창하였는데, 이는 중국
동산법문(東山法門)의 홍인(弘忍)을 계승한 혜능은 중국불교에 결정적인 사상적 변용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혜능의 어록(語錄)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이하 〈단경〉)이 후대에 많은 첨삭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혜능의 사상으로부터 출발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단경〉에 나타나는 사상은 가히 ‘혁명’적이어서 중국 학계에서는 이른바 ‘육조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일개 조사의 어록을 ‘경(經)’이라고 칭하는 것과 ‘단(壇)’을 붙이고 있는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본래 불교
도신(道信)이 황매(黃梅)의 쌍봉산에 도량을 개설하고, 홍인(弘忍)이 그를 계승한 동산법문(東山法門)은 당시 불교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천하의 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운집하였다. 전적에 따라 다르지만, 도신 문하에 5백 혹은 7백 명, 홍인 문하에 1천 2백 명의 승려들이 운집하여 수행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불교사에서도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다.동산법문이 이름을 떨치자 홍인의 제자들도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최초로 황제의 주목을 이끈 이가 바로 신수(神秀, 606~706)이다. 당시 당조(唐朝)는 개국 76년 만
수·당(隋·唐) 교체기에 중국 선종의 실질적인 창립자인 도신(道信)은 황매(黃梅)의 쌍봉산(雙峰山)에 선림(禪林)을 창립하였다. 이는 당시에 형성된 참다운 수행자는 마땅히 깊은 산에 머물며 은둔하여 수행해야 한다는 ‘은둔잠수(隱遁潛修)’의 전통을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전란으로 인하여 도적들이 창궐하여 사찰까지도 약탈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큰 사찰이 없었던 쌍봉산에 은둔하였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속고승전〉의 전기에 “내가 입산한 30여 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도를 배우려는 자가 멀다고 오지 않음이 없
당(唐) 건립 후 발생한 불도지쟁(佛道之爭)으로 인하여 고조(高祖)가 내린 경사(京師)인 장안(長安)에 다만 3개 사찰에 1천 명의 승려만 남기고, 나머지 사찰은 모두 왕공(王公)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조칙(詔勅)은 이세민(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즉위하면서 대사면(大赦免)을 내려 겨우 폐불의 상황을 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는 법림(法琳) 등의 호법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폐불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수대(隋代)의 봉불(奉佛)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까닭도 있고, 다른 측면으로는 바로
당(唐) 초기의 격렬했던 불도지쟁(佛道之爭)의 상황에서 중국불교의 정체성과 교단의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고승이 바로 도선(道宣, 596~667) 율사(律師)이다. 도선은 〈사분율(四分律)〉과 관련된 일련의 저술을 통하여 계단(戒壇)을 건립하였고, 〈석가씨보(釋迦氏譜)〉 등의 찬술하여 불조(佛祖)의 인연을 밝혔으며,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등을 찬술하여 중국에서 번역되고 찬술된 목록을 정리했고, 〈광홍명집(廣弘明集)〉 등을 찬술하여 도교의 비판에 대응하였고, 〈속고승전(續高僧傳)〉 등을 찬술하여 고승들의 행적을 정리하였다. 도
중국선의 사상적 전개에 있어서 우두선(牛頭禪)은 보리 달마(菩提達摩)의 달마선과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세운 도신(道信)과는 또 다른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에 달마-혜가계, 그리고 도신-홍인의 동산법문, 또한 우두종을 창립한 우두 법융 등을 모두 하나의 법계로 연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세 가지 계통은 각각 다르게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심층적인 선사상(禪思想)에 있어서 서로 극명한 차별이 나타나며, 법맥도 후대에 조작한 흔적이 여실하게 보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당(唐) 초기에 활동한 우두 법융(牛頭法融, 594~6
남북으로 분열된 남북조를 통일시키고 불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하고자 했던 수대(隋代)는 무리한 고구려 침공에 따른 후유증과 황실의 혼란으로 단명하고, 뒤를 이어 문제(文帝)의 충신이었던 이연(李淵)이 당(唐, 618~907)을 세우게 되었다. 당이 건립되면서 남북조 이래 중국사상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여왔던 불교는 다시 유도교 양교의 치열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황가(皇家)의 성인 이씨(李氏)의 조상이 노자(老子, 李老聃)라는 인식과 고조 이연의 모친이 두(竇)씨로서 서한(西漢) 시기 황로학(黃老學)의 절대적 지지자였던
수대(隋代)는 40년을 못 채운 짧은 역사를 지녔지만, 불교학에서는 천태 지의(天台智?)와 길장(吉藏) 등의 고승들이 출현하였고, 또한 이 시기에 중국 선종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인물이 출현하였으니, 그가 바로 도신(道信, 580~651) 선사이다.도신의 생애는 후대에 선종의 사조(四祖)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문헌에서 기재되고 있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전법보기(傳法寶紀)〉, 〈조당집(祖堂集)〉 등 선종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전적에 그의 전기가 실려
수대(隋代)에 문제(文帝)와 양제(煬帝)의 불교부흥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고승들이 출현하였고, 그에 따라 불교학의 발전 역시 두드러졌다. 이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천태학을 건립한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智?)이지만, 또한 구마라집(鳩摩羅什)에 의해 번역된 〈중론(中論)〉, 〈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으로부터 출현한 삼론종(三論宗)을 정립한 길장(吉藏, 549~623)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길장은 남조의 진(陳)으로부터 수대를 거쳐 당(唐: 618~907)이 건립된 이후에 입적하였으니, 그 생애가 삼조(三朝)에
중국역사에서 가장 복잡했던 남북조의 분열된 시기는 수(隋)의 문제(文帝)에 의하여 다시 통일되면서 종식되었다. 이는 서진(西晋)의 멸망(317) 이후 약 260년이 지난 이후이지만, 수대(隋代, 581~619)는 양제(煬帝)의 대운하 건설과 고구려 침공 등의 원인으로 40년이 안 되어 멸망하였다. 그러나 짧은 수대에 중국불교는 사상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수조(隋朝)를 세운 고조(高祖) 문제(文帝, 楊堅)의 불교부흥 정책 덕분이고, 또한 남조와 북조에서 서로 다른 발전을 이룬 불교학을 통합시켰던 것에 기인한다고
남북조시기에 남방은 의리(義理)를, 북방은 선정(禪定)을 중시하는 학풍에 따라 북조(北朝)에서 선정이 유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불타선사(佛陀禪師)와 승조(僧稠), 그리고 동시대에 활동한 승실(僧實)이라고 하겠다. 도선의 〈속고승전〉 권20에는 “북제(北齊)의 하북(河北)에서 승조가 홀로 명망이 높았고, 북주(北周)의 관중(關中)에서 승실이 교화하여 명성이 높이 올랐다. 〈중략〉 그러므로 중원(中原)의 정원(定苑, 定學)에 강령(綱領)을 세우고 전개하게 한 것이 이 두 현자이고, 그 족적을 이어 등불을 전하며 교
중국은 북방 소수민족들의 침공으로 서진(西晋)이 망하고, 남하하여 지금의 남경(南京)에 동진(東晋)을 세웠고, 북방에는 16국이 난립하게 되었다. 이후 남방은 송(宋)·제(齊)·양(梁)·진(陳)의 왕조들이 명멸하여 이를 남조(南朝)라 칭하고, 북방에는 북위(北魏)가 16국을 통일하였지만, 동위(東魏)·북제(北齊)로 분열되고, 그를 서위(西魏)·북주(北周)가 계승하게 되는데, 이를 북조(北朝)라고 칭하며, 이 시기를 통칭하여 남북조(南北朝)라고 한다. 이 남북조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복잡한 시기이지만, 오히려 이 시기의 불교는 학문적으
구마라집(鳩摩羅什)과 승조(僧肇)에 의하여 중국 반야학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한다면, 본격적인 중국불교의 불성론(佛性論)과 돈오론(頓悟論)은 바로 도생(道生, 약 372~434)에 의하여 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불교학계에서는 도생을 인도로부터 전래한 불교를 그 본의를 잃지 않고 가장 중국식으로 해석하여 불교의 중국화를 이룬 선구자로서 인정하고 있다. 그러한 인정은 바로 도생이 제시한 불성론과 그로부터 발현된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도생의 ‘돈오론’은 이후 대부분의 종파에서 적극적으로 채택되고,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불교는 사상적으로 크게 일변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구마라집의 역경(譯經)과 강설(講說)이 뛰어난 덕분이지만, 그의 문하에 승조와 도생(道生) 같은 뛰어난 제자들의 작용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하겠다. 중국불교의 사상사(思想史)에서 불교의 흐름을 바꾼 불세출의 존숙(尊宿)들 가운데 그에 호응하는 제자들을 못 만나서 그 명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구마라집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은 바로 승조(374, 378, 혹은 384~414)이
동진십육국 시기에 들어서 중국불교에는 사상적으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구마라집(鳩摩羅什, 혹은 鳩摩羅什婆, 344~413)이다. 그의 전기는 〈고승전〉 권2, 〈출삼장기집〉 권14 등에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그의 부친 구마염(鳩摩炎)은 본래 천축국(天竺國)의 승려로서 구자국(龜玆國, 현 新疆 疏勒)의 왕이 국사(國師)로 임명하였지만, 왕의 여동생이 그에게 반하자 왕은 그 둘을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 여동생은 두 아들을 낳았지만, 오히려 불법에 귀의해 7살의 구마라집과 함께 출가하여 수
유교를 바탕으로 한 보수 세력이 쿠데타로 조위(曹魏)를 멸하고, 손오(孫吳)와 유촉(劉蜀)을 정벌하여 다시 중국을 통일했지만, 황권의 권력싸움인 팔왕지란(八王之亂)이 발생하고, 그 후에 수십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50여 년의 짧은 역사로 멸하였고, 북방에는 다섯 소수민족[五胡: 芩큰·哲·?굅·巒·퓬]이 세운 16국이 난립하였으며, 서진의 황실은 남하하여 지금의 남경(南京)인 건강(建康)을 수도로 하여 동진(東晋)을 세웠다. 이 시기를 ‘동진십육국’이라고 칭하는데, 남방의 동진이나 북방의 16국들은 모두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설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