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도 골라가는 시대, 전철역 근처나 사람 좀 들고나는 곳이면 영화관 하나씩은 있는 시대다. 영화관이 하나라도 스크린은 여럿인 복합상영관, 멀티플렉스. 그러면 그런 영화관에서 스크린 숫자만큼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장 흥행이 잘 되는 영화를 아무 때고 가도 볼 수 있게 같은 영화가 주르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는 있기는 한데 시간표가 평일 아침 첫 회 아니면 마지막 회, 그것도 아니면 한참 바쁜 낮 시간대에 퐁당퐁당.이렇게 스크린이 많은데도 또 어떤 영화는 예매 시작하자마자 매진이 되어 볼
지금도 선명한 장면이 있다. 별 생각 없이 틀어놓은 뉴스에 비친 바다. 방송 카메라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배가 기울고 있다고 했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이 단체로 타고 있다고. ‘저런, 큰일이네, 아이들 참 무섭겠다. 부모들 걱정이 얼마나 클까’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다들 알게 된 상황이니 곧 구조가 되려니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원 구조’라는 뉴스가 이어졌고, 수학여행 제대로 하긴 글렀으니 좀 억울하려니 정도로 생각했었다. 꼬박꼬박 세금 낸 보람도 느꼈다.아니었다. 오보란다. 어선들이 달려가고, 헬기가 떠있는 장면을
SF는 영어로 Science Fiction, 그러니까 과학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를 지어내는 장르이고, 관습적으로는 ‘공상과학’이라고 번역하곤 한다. 그런데 사실 SF장르 안에 ‘공상’과 ‘과학’에 고르게 방점을 둔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개봉 전부터 전 세계 흥행을 노린 〈듄: 파트2〉 같은 작품은 원작인 소설이나, 그 소설의 설정을 가져다가 만든 컴퓨터 게임이나 1984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연출했던 〈듄〉(이 영화를 당시에는 ‘사구’, 그러니까 ‘모래 언덕’이라고 소개됐던 작품)이나, 최근작까지 아무리 살펴봐도 설
학교 다닐 때, 소풍날이나 운동회에 비가 오면 아이들끼리 소곤대곤 했다. ‘우리 학교 처음 지을 때 땅을 파는데 피가 쏟아지더니 커다란 이무기 몸통을 잘랐대. 하루만 더 있으면 용이 되어 승천하려던 이무기였는데 그렇게 죽게 되면서 원한을 품고 저주를 내렸대. 그래서 소풍날이나 운동회 때마다 비가 오게 된 거래.’ 뭐 이런 이야기들.황당하지만 뭐, 아주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기도 하다. 근대적 학교는 갑자기 넓은 빈 터를 필요로 했고, 풍수를 오래 존중해온 문화권에서 좋은 땅은 이미 ‘명당’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에서는 이미 사람이 들어
한국영화 10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서 반드시 꼽히는 불교영화라면 특히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와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이 꼽힌다.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만든 〈만다라〉는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협업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작품으로 꼽힌다. 수행자로서 겪게 되는 번뇌와 만행의 과정에서 계율로 자신을 다스리려는 법운 스님(안성기 분)이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무애한 해탈의 길을 구하는 지산 스님(전무송 분)과 맞닥뜨리며 품게 되는 고뇌를 영화는 법문이 아니라
불교는 차별에 반대하는 종교다. 그렇기에 불교는 오래전부터 종교, 성 정체성, 이념 등에 의해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의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해왔고,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를 구성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실천행을 펼쳐왔다. 특히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은 2021년 10일 동안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30㎞를 오체투지로 나아가기도 했다. 심상치 않은 시대적 상황과 팍팍한 개인의 실존 사이에서 자신의 능력과 성 정체성 가운데 하나는 포기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남장 여자를 중심으로 하는 드라마는 〈바람의 화원
많은 종교들은 종말을 이야기한다. 인간을 비롯한 세상 만물이 미래에는 모두 멸망하게 된다면서 그때 자기 종교만이 구원을 약속하리라는 종말론은 대중의 믿음을 이끌어내는데 아주 유효하다. 그런데 불교는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현세를 극복할 희망을 이야기한다.현상계는 생성과 지속, 소멸의 과정을 되풀이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윤회를 거듭하는데, 언제부터 윤회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행을 완수해 모든 번뇌를 끊고 다시 생사의 세계에 윤회하지 않는아라한이 되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불이 있었든 미래불이 있
지구가 아프다.물-땅과 물과 대기도 두루 아프고, 심-깃들어 사는 생명들의 앞날도 막막한 지금의 지구는 물심양면으로 아프다. 영하 40도 아래로 추위가 덮친 날씨가 계속되는 북유럽, 새해 첫날부터 지진으로 무너진 일본, 날마다 전쟁으로 죽고 죽이는 나라들, 그 기후위기와 전쟁의 여파로 무너지는 세계 경제와 평화.사람들은 가끔 사라지려는 것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데서 생명이 지속되리라는 위로를 찾는다. 더 이상 자연에서는 볼 수 없고 외교적 잇속 따져가며 동물원에서나 전시되는 판다에 대한 열광도 그런 예가 될 것이다.〈친애하는 지구에게
마음을 헤아려 뜻이 통하는 일은 지극한 일이다. 오죽하면 깨달음을 얻고 수많은 제자들과 대중에게 둘러싸여 있던 부처님 마음을 아는 이가 단 하나였을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대중에게 설법을 하시다가 가만히 꽃을 들어 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몰라 갸우뚱할 때 가섭존자만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말이나 글로 전하지 않은 마음이 고스란히 마음으로 통했기에 가섭존자도 말로 답하지 않고 웃음으로 답했다는 이 일화는 마하가섭이 불제자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히게 된 근거이기도 하다.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인다는 염화시중(拈花示衆)에서
태양계 지구별은 해가 뜨고 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맞춰 살아가는 뭇 생명들과는 좀 다른 생명체들이 번성하고 있다. 중심이 되는 태양을 기준으로 보자면 뜨고 지는 태양과 지구별 사이에는 약속된 연이 있어서, 날과 달, 계절이 바뀌고, 그 바뀌는 법칙을 헤아려 그 안에서 세상일을 새기는 일을 역사라고 하는 중생들이 바로 사람이다. 그러면서 어떤 날일시는 돌고돌아 다시 오는 해와 달과 지구 사이의 좌표에서 벗어나 그 날짜 자체만으로 고정되는 특별한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 지표들은 중생들의 과보로 보자면 업을 지은 순간들일 것이다. 그리
조선시대에 나라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던 큰 전란으로는 왜란과 호란이 있었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었던 왜란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였고, 이 전쟁에서 우리 역사는 왕이 아니라 두 지도자를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기억한다. 성웅이라는 칭호를 받은 이순신 장군과 승려로서 의승도대장이라는 공직을 맡아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우고 전후 수습에도 외교관으로서 활약한 사명당 유정 스님.그런데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나라였다. 승려가 되려면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했다. 국가에서 발행한 도첩이라는증서 받아야 되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몸, 입, 뜻으로 짓는 말과 동작과 생각,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인과를업(業)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께서는 중생이 의지와 실천 대신 어떤 상황에 대한 노력도 하지 않고 숙명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로 업의 핑계를 삼으려할 때, 업력이란 서로 주고받는 인연화합(因緣和合)과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에서, 마음의 주체의지에 의해 그 강약이 나타난다고 일깨우셨다. 특히, 행위에 결과로서의 업은 자연법칙적인 인과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윤리성에 직결된다고 가르치셨다. 업이란 선악을 짓는 것이고, 그 행위의 결과가 과보다. 업장으로 이어지는 과
불교를 두고 어려워하는 오랜 물음 가운데 하나로 ‘무아’와 ‘윤회’의 문제가 있다. 무아(無我)란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질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윤회(輪廻)는 중생이 삶을 다하면 사는 동안 지은 업에 따라서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는 믿음이다. 아니, 무아라면 나 자신이 없다는 건데 지은 모든 업을 지고 다시 태어난다는 건 나라는 것이 여전히 집요하고 굳건히 있다는 것이니 가르침끼리 서로 모순이 아닐까? 이 물음은 불심이 부족하거나 공부가 얕아서 생기는 의심만도 아니고, 불교의 가르침을
많은 사람들이 압박하는 사이에서 홀로 몰리던 사람이 아주 절박한 표정으로 달려 나와 나누어주며 동참을 호소하는 이런 유인물을 받았다.“고통을 주는 존재는 누구든 사라질 수 있어요. 남자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는 누구든 사라질 수 있습니다.절대 남자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남자가 다 사라지고 나면 여자에게 고통을 주는 여자가 사라질 겁니다. 여자에게 고통을 주는 여자가 사라지면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이 사라질 겁니다.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이 사라지면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동물이 사라질 겁니다.
108배를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108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고약한 지를 30배를 해도 1/3이 안되고, 50배를 해도 절반이 안 되고, 100번을 엎드렸다 일어나도 아직 남아있는 그 어려움을. 마라톤도 그렇다. 출발이 좋아도 계속 1위가 아니고, 10㎞를 달려도 1/4이 안되고, 20㎞를 달려도 절반이 안되고, 겨우겨우 40㎞를 달려도 막판 스퍼트로 순위가 바뀌는 아슬아슬한 경지. 수행을 하듯 자신과 길 사이에 어떤 화두를 끝까지 잡아야만 이룰 수 있는 완주의 길. 거기서 메달을 딴다는 것은 화두를 깨우치는 것과도 같은 수행의
불교를 일컬어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으며, 한 사람의 깨달음이 번져 나가 모든 중생의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제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그런데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종종 불교에서는 깨달은 자가 살아가는 구체적 모습, 그러니까 선지식의 행적과 선문답에서 깨달음을 찾곤 한다. 그런데 기록으로 남아 있거나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이야기로 전해지는 선지식의 모습은 지금과 말도, 풍습도, 문화도, 상식도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니까 그 선지식이 살아가던 시대의 깨달음을 지금 시대에 그대로 재현한다고
아마도 동물계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건 판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이언트 판다일 것이다. 냉전시대부터 지금까지 ‘죽의 장막’이라며 쉽게 곁을 주지 않던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특별히 외교적으로 화해와 친교를 맺는 나라에 보내는 외교 사절은 스포츠 선수나 문화예술계 명사나 정치인이나 과학자보다도 더 각별하게 바로 판다를 통해 이뤄졌다.자이언트 판다는 멸종 위기에 있는 희귀한 동물인데 딱 중국 특정 지역에만 있어서 아무나 볼 수는 없는데 귀여운 생김새 때문에 캐릭터 상품으로는 아주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볼 수 있으려면 여러 상황
한꺼번에 한 단체의 이름으로 전세계에서 이토록 많은 청소년들이 모여 짧지 않은 기간 함께 지내는 행사는 흔치 않다. 더구나 호텔이나 리조트가 아니라 텐트를 치고 자연 안에서 먹고 자며, 자신들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소비’나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교류’와 ‘소통’, ‘체험’을 통해 성장하고자 하는 행사라니 참 뜻이 좋은 행사가 바로 ‘잼버리’다.원래 잼버리는 민족, 문화 그리고 정치적인 이념을 초월하여 국제 이해와 우애를 다지는 보이스카우트의 세계 야영대회인데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4년 주기로 열리
지금은 ‘서울’하면 강남이 노른자라고들 여기지만 한양 도성 사대문 안만 서울이던 시절, 강남은 뽕나무밭이었다. ‘상전벽해’란 말은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고사성어다. 고사성어라고 하면 널리 알려진 옛 이야기에 나오는 표현이 아예 특정한 상황을 이르는 관용어로 굳어지게 된 것이니, 상전벽해란 말에도 얽힌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의 신선 이야기를 모은 ‘신선전’에 실린 ‘마고선녀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 전래 문화에서 단군 이전부터 창조신, 거인신으로 받들어지는 마고신, 마고할미는 큰 산이 있는 곳에는 전국 여기저기 돌을
세간에서는 절기로 계절을 알고, 영화계에서는 영화제로 계절을 느낀다. 국내 영화제 가운데 봄을 여는 영화제가 전주국제영화제라면 여름의 대표적인 영화제는 연혁으로나 대중적 인지도로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감독, 프로듀서, 연기자, 영상산업관계자, 학자들이 모이고, 시네필들이 모이고, 영화제를 개최하는 도시의 시민들과 어울려 ‘이상해도 괜찮아’라는 열린 마음으로 영화를 즐기는 것이 영화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3년 만이라 더 각별하고, 더 반가웠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복원된 고전 명작,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