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청룡사 가는 길

서울 대학로 뒤에서 열리는 낙산 성곽길. 정순왕후도 남편인 단종을 기다리며 매일 같이 청룡사에서 이 길을 걷지 않았을까. 오래된 슬픔이 모두의 가슴에 주르륵 물줄기를 낸다.

고려 태조 922년, 불교와 풍수를 습합한 도선 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지은 청룡사는 지금도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17-1번지에 존재한다.

청룡사는 그 남성적인 이름과 달리 고려와 조선에 걸쳐서 여성의 수난사를 기록하고 있다. 청룡사를 한때 정업원(淨業院)이라고 불렀으니, 한마디로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닦아야 할 업이었다. 한 나라의 군주를 모시던 왕비나 후궁일지라도 그 권력의 부침에 따라 때때로 궁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위해, 혹은 왕의 안위나 명복을 빌기 위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들 왕비나 후궁, 상궁 나인이 기거했던 비구니 절이 바로 청룡사였다.

 

60년 남편 기다린 여인, 정순왕후

그 한 서린 낙산 언덕길을 걸으면

500년 세월에도 그 슬픔 전해져

 

대표적으로 신하들에게 타살당한 공민왕의 후궁 안 씨,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복형 이방원에게 참살당한 의안대군 이방석의 부인 심 씨가 청룡사를 귀의처로 삼았다. 모든 여인들은 극명한 영욕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는데, 그 이야기가 애틋하기로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를 따를 순 없다.

낙산 언덕길의 청룡사 일주문 앞.

낙산은 성곽길 걷기를 목적으로 하면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지문에서 혜화문까지가 제격이고, 절길을 걸으면서 불교문화유산을 둘러보려면 대학로에서 보문동으로 이어지는 지봉길이 제격이다.

나와 도반들은 어느 봄날 지봉길을 택해 걸으려 혜화역 1번 출구에 모였다. 낙산에 이르기까지 식당이 밀집한 거리와 연립주택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을 지났다. 빗장이라도 질린 듯 답답했던 가슴이 어느 순간, 높다란 성곽이 받힌 하늘을 만나면서 뻥 뚫린다. 지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서울의 대부분 길을 도시문명이 장악한 탓에 낙산의 절길도 자주 시멘트벽에 가로막혔지만 이 또한 제행무상(諸行無常), 길이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건 순전히 시절 탓이 아니겠는가.

한 노인이 낙산공원 정자 아래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허물어진 입가와 옴팍눈, 파뿌리처럼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쓸쓸한 어깻죽지에서 폐서인 송 씨를 본다. 그녀의 삶이 여든을 넘었다니 모질기도 꽤 모진 일생이었나 보다.

정순왕후 송 씨는 당신보다 한 살 어린 단종과 열다섯 살 때 결혼했으나 그 영화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숙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던 것이다. 어린 단종은 영월로 귀양 가야 했고, 지아비가 귀양길에 올랐으므로 정순왕후도 궁궐을 떠나야 했다.

야사가 전하기로, 정순왕후는 흥인지문 밖 영도교에서 눈물로 단종을 전송했다. 단종은 송파나루에서 영월 가는 배를 탔겠지만, 유배지는 물론 영도교를 건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 송 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녀에게 허락된 건 낙산 동망봉(東望峰) 아래 청룡사에서의 삶이었다.

낙산에는 실학자 이수광이 살던 비우당(庇雨堂)이란 집이 있다. 말 그대로 비를 피하는 집이다. 이수광은 이곳에서 유명한 지봉유설을 썼다. 눈에 띄는 것은 이수광의 초가집 뒤란에 있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란 작은 우물이다. 정업원에 기거한 폐서인 송 씨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저고리 고름이나 댕기에 물감 들이는 일을 했다. 우물을 자주 찾은 건 그 때문이었다.

그처럼 힘든 삶을 꾸려나가면서도 송 씨는 여전히 임금을 잊지 못해 자주 동망봉에 올랐는데, 그 세월이 무려 60년이란다. 페미니즘을 넘어 모계사회로 가고 있다는 요즘 정서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여인 아닌가.

그토록 고고한 여인의 그리움, 그 넓이를 지닌 동쪽 하늘이 궁금해선지 비우당을 나와 동망산 동망봉으로 향하는 걸음들이 빨라졌다. 가는 길이 재개발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는 포장도로이다. 문득 과거와 현재가 내 눈앞에서 포개진다. 일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송 씨가 고층 아파트와 뾰족한 첨탑의 신축교회 곁을 타박타박 걷는다.

길은 이내 사거리로 흩어진다.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청룡사와 정업원 옛터, 왼쪽 길로 내려서면 보문사와 미타사, 앞으로 직진하면 동망봉이다. 보문사와 미타사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집이다. 보문사는 보문종이라는 비구니 만의 종단이고, 오래된 탑을 뒷동산에 둔 연유로 탑골승방이라고도 부르는 미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이다. 청룡사는 탑골승방보다 40여 년 후에 지어 새절승방이라 부른다.

청룡사는 한때 낙산을 뒤덮을 정도로 사세가 컸다. 비우당을 빠져나오는 길에서 ‘단종대왕 천도도량’이라는 태고종 원각사를 보았는데, 그 절 또한 청룡사의 한 부속건물이었다고 청룡사 종무보살이 전한다.

동망봉으로 오르는 언덕길 사이로 한쪽은 담을 쳐놓고 아파트를 신축 중이고, 다른 쪽은 낮은 지붕의 창문 너머로 드륵 드르륵, 재봉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금세라도 포크레인이 올라와 그마저 폐허로 만들어버릴 것 같다. 동대문 시장이 가까운 이 동네 사람들이 의류에 관련된 일로써 생계를 꾸려온 건 어제 오늘이 아니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졌다는 청룡사 우화루.

앞장서 언덕길을 걷던 정순왕후 송 씨가 어느새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노 비구니의 뒷모습으로 변해 있다. 청룡사로 귀가하기 전 송 씨는 언제나 해 저문 언덕길을 올랐다. 남편 단종이 살아있을 때도 올랐고, 죽어서도 올랐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는 뒤쪽이 절벽이고 나머지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유배지였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수양대군이 내린 사약을 들고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은 목을 매 자진한다.

송 씨는 남편이 죽었건 살았건 그저 동망봉에서 영월 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어린 남편보다 64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낙산 동망봉으로 오르는 산동네 길이 정겹다.

동망봉에 오르니 체력단련을 위한 헬스 기구들이 눈에 띈다.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맨 노인이 마라톤 트레이닝 복장으로 구민공원을 맴돌고 있다. 나와 도반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동망봉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찾아냈으며, 폐서인 송 씨가 그 자리에서 그러기라도 한 듯 동쪽 하늘을 오래도록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500년 전의 하늘이 500년 후의 동망봉을 마주 보고, 오래된 슬픔이 모두의 가슴에 주루룩 물줄기를 낸다. 모두가 말을 잊은 채 먼 하늘에 눈을 팔았다.

 

쪾걷는길 : 혜화역 1번 출구 - 낙산 공원 제 1전망대- 비우당 - 동망봉 - 청용사 - 보문사와 미타사 - 보문역

쪾거리와 시간 : 4km 정도, 2시간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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