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⑤

무지는 집착·갈애의 원인
명상 통해 마음근육 키우면
왜곡된 자아 넘는 ‘용기’ 통해
正見을 정직한 행동으로 표출

부화뇌동의 유혹
요즈음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에서 보여주는 촛불행렬과 태극기행렬의 시위행태는 마치 마주보고 달려가는 제동장치가 고장 난 열차와 같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조마조마하고 절박한 상황이다. 이런 정국을 바라보노라면 애만 탈뿐 용기가 나지 않아 바라만 보고 있는 자신이 한스럽기도 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이러한 정국을 바라보기로 한다.

어느 산중에서 낮잠을 자던 토끼가 땅이 흔들리는듯한 굉음에 놀라 앞뒤도 가리지 않고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판단하고 그 곳에서 벗어나 달리면서 ‘지진이야!’라고 외쳤다. 주변에서 이 소리를 듣던 수많은 짐승들이 ‘어디! 어디!’라고 놀라면서 토끼와 같이 달렸다. 그러다 보니 산 중의 짐승세계가 온통 난리법석이 되었다. 이런 혼란 중에도 동물의 왕이라고 하는 호랑이가 재빨리 그 무리들 앞으로 나가 큰 흐름을 막으면서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앞에 있던 치타가 “얼룩말이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얼룩말은 “기린이 그랬어요” 이어서 기린은 “캥거루가 그랬어요” 이렇게 이어가자 결국 토끼가 처음 지진이 일어났다고 말했음이 밝혀졌다. 그러자 호랑이는 토끼에게 지진이 일어난 곳을 가보자고 하였고, 막상 가보니 지진의 흔적은 없고 그 곳에 도토리 한 개가 떨어져 있었다. 귀를 땅에 대고 낮잠을 자던 토끼에게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그처럼 크게 들렸던 것이다. 도토리 하나로 온 산의 동물세계가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결국 처음부터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토끼로부터 시작은 했지만 어느 누구도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바람에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상황은 다르지만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 사례도 있다. 어느 들판에 잘 생긴 사자와 예쁜 소가 만났다. 둘은 한 눈에 반했고,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다. 결혼 후 그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 사자는 고기 중 가장 맛있는 부위를 소에게 주었고, 소는 가장 맛있는 풀을 사자에게 주었다. 그러나 둘은 입에 맞지 않은 고기와 풀을 먹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둘은 마지막으로 “나는 당신에게 최선을 다 했어”라고 말했다. 둘은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헤어지고 말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서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빚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사례는 집단이 보여주는 어리석은 행태요, 두 번째 사례는 개인의 비합리적인 신념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나 이 두 사례와는 다르게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 개인이 가진 이성과 용기라는 품성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사례가 있다. 한 회사에서 직원을 한 사람 뽑는데 세 사람이 지원을 했다. 사장은 첫 번째 지원자에게 복도에 있는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곧장 그렇게 했다. 다행스럽게도 가짜 유리였고, 그는 손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두 번째 지원자에게는 구정물을 구석진 방에 있는 청소부에게 뿌리라고 했다. 그는 구정물이 든 물통을 들고 곧장 청소부에게 가서 뿌렸다. 그제야 사장은 그 청소부는 밀랍으로 만든 인형이었음을 알려주었다. 세 번째 지원자에게는 로비에 있는 뚱뚱한 사람을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지원자는 “죄송합니다. 저는 그 사람을 때릴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폭력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사장은 세 번째 지원자를 합격시켰다. 그는 사장이 내린 터무니없는 지시를 이성적인 판단으로 용감하게 거절할 줄 알았다. 여기서 용감하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정의롭다는 뜻이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단지 용감했다면 기껏해야 필부지용(匹夫之勇)에 불과했을 것이다. 용감하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대개 올바른 인품에서 나온다. 옳지 못한 상황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정의롭고 이성적인 용기야말로 진정한 힘이요 능력이다.

분별의 시작, 팔정도
위의 몇 가지 사례에서 보았듯이 첫 번째 사례는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부화뇌동의 모습으로 위기에 이르렀지만 현명한 지도자가 나타나 위기를 막는 모습이다. 두 번째 사례는 올바르게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신념만을 믿고 행동하다가 쪽박을 깬 상황이다. 세 번째 사례는 이성과 용기를 가진 개인이 전체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대처한 이상적인 모습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올바른 견해가 필요하다. 2500여 년 전 부처님은 팔정도(八正道)를 통해 인간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안내했다. 불교에서는 붓다의 깨어있는 삶을 모델로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음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개인은 외부로 향하는 자기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를 회수하여 자기의 내면을 탐색함으로써 자각하거나 깨달음에 이를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움이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오로지 자기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통찰에 이르러야 한다. 팔정도의 통찰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신성한 진리의 길을 연마함으로써 그 진리를 통찰하는 것’이다. 지혜로써 올바른 이해(正見)와 올바른 욕구(正思惟), 도덕적 행위로써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이 있다. 그리고 집중으로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챙김(正念), 올바른 집중(正定)이 있다.

본 주제에서는 올바른 이해(正見)와 올바른 행동(正業)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인간의 외적 행동은 바로 마음이 작용하여 나타난 겉모습이다. 마음이 올바로 작용하면 올바른 행동이 나타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올바른 이해가 있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기중심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올바른 이해를 계발할 때, 대상의 실상을 여실히 보고 관찰하는데 지성을 사용할 수 있다. 지성은 관찰하고 실재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능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에 마음을 여는 데 알아차림, 무지가 아니라 지혜로써 분별력을 사용하게 된다.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무명) 우리 인간은 아무런 마음의 제어도 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서 쾌락(행동)을 얻으려고 헤맨다. 아름다운 대상, 좋은 소리, 향긋한 냄새, 맛있는 음식, 몸의 감촉 등 감각적 쾌락을 얻는 일을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이 대상들을 얻기 위해 삶의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 붇는다. 여기에는 감각적 쾌락이 진정한 즐거움이라는 무지가 깔려있어 즐거운 느낌을 얻으려고 더욱더 갈애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지 때문에 갈애가 생기고, 갈애 때문에 집착이 생겨나는 조건적인 관계(緣起的 生成)가 형성되는 것이다. 강한 집착이 생기면 인간에게는 다시 ‘자아(ego)’라고 하는 거짓 내가 생겨난다. 잘못된 견해가 그 원인이다.

올바른 이해(正見)를 위해서는 나와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이 사회와 국가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한다. 만일 그러한 현상들이 자신의 욕망이라면 이를 자각(正見)하고 자기를 넘어서는 초자아, 즉 세상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명상은 원하는 생각을 선택하고 그런 생각에 주의를 집중하게 한다. 이렇게 생겨난 힘은 즉각 반응함으로써 에너지를 고갈시키기보다는 대응하기에 적절한 때를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게 해 준다. 비록 현 시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때를 기다려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음의 근육을 강화시켜야 한다.

용기는 현실을 바꾼다
올바른 견해(正見)는 용기와 만날 때 비로소 올바른 행동(正業)으로 나타난다. 용기(courage)란 인생의 장애에서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힘이다. 호킨스(2009)에 의하면 의식수준에서 ‘용기’의 에너지는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이 수준은 진실성과 정직, 자율, 대처능력의 에너지이다. 용기의 수준에서는 행동에 역점을 둠으로 그들은 이 세상의 참다운 행동가라고 할 수 있다. 용기 상태에 있으면 자신에게 내면의 힘, 능력, 자아존중감이 있음을 느낀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꾸어 볼 줄 아는 능력이 있고, 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행복까지 염려하는 마음이 있다.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 감정에 지배되거나 생활방식까지 좌우되지 않는다. 용기수준에서는 의식이 깨어나며, 자신의 신념과 관점은 단지 이전에 맹목적으로 주입받는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점을 깨닫는다.

생각은 용기를 만났을 때 행동으로 표현된다. 이 때 생각이 어떠냐에 따라 용기라는 추진력이 작용하는데, 호킨스의 말처럼 정직이 용기의 힘으로 작용하고 용기는 행동으로 표현된다. 용기의 에너지는 ‘난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단호하고, 삶에서 열정을 느끼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어서 효과적인 행동을 한다. 용기 상태에 있으면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능력이 있음을 안다.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존재가 되는지가 중요하다.

정견은 ‘있는 그대로 보는데’서 생겨나고, 용기는 ‘정직’한데서 생겨나며, 행동은 이 두 품성이 하나가 될 때 일어난다. 한 나라의 수도인 서울에서 보여주는 시위행렬의 많은 사람들이 부화뇌동이 아니라 정견을 가지고 참여하기 바란다. 모두 의식이 깨어있어서 정견과 용기로 절박한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