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봄맛 담긴 선물 같은 ‘한 그릇’

봄소식 알리는 계절 전령사 쑥
보드라운 잎은 호사스런 선물
맛·향 어느 무엇과도 대체불가

햇살 따스한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오던 아이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둑길에 누워 단잠에 쿨쿨 빠져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나가던 누렁소가 모른 체하며 기척을 주지 않았더라면 내내 꿈을 헤매었을지도 모를 그런 날. 잠을 깨워준 소는 느린 걸음으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따라 가버리고, 잘 자고 일어난 아이는 그제야 신나게 집을 향해 내달린다. 

혼날 것이 걱정되지 않은 것은 매양 듣는 꾸중도 걱정 반, 사랑이 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 멀리 보이는 온화한 불빛, 그 문을 열면 지금도 그리운 사람들과 구수한 저녁 냄새가 가득히 차오르던 기억. 유독 잠이 많던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지만, 그 날의 엉뚱한 일탈은 추억의 이름으로 오래오래 마음을 간지럽힌다. 

잠들었던 개구리가 깨어나고, 먼 나라로 떠났던 새들도 돌아온 지 오래. 우주는 가장 연하고 고운 빛깔로 이 계절을 알린다. 세상 모든 추억이 꽃으로 피어나는 시절, 봄이 돌아왔다. 

땅에서 마음으로 

우리네 들녘에 어린 넉넉한 기운, 그 우직한 땅심은 모든 생명을 품어낸다. 아이들은 자면서 큰다고 했던가. 아마도 그날의 다디단 낮잠은 아이를 몇 곱이나 훌쩍 자라게 했을 것이다. 들꽃처럼, 새싹처럼, 아기염소처럼 튼튼하고 다부지게.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엿본 것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주호 스님(김천 송학사 주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누군가의 어린 시절, 그 시간이 덩달아 그리워지는 것은 이제는 쉬이 만나지 못할 정겨운 풍경이 그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터다. 

“은사스님께선 우스갯소리로 너를 키울 때 얘기를 글로 쓰면 책 열 권은 나올 거라고 말씀하셔요. 둑길에서 잠들었던 그 날도 하루종일 어딜 다녀온 거냐고 걱정하셨는데, 저는 속 편하게 ‘졸려서 그냥 잤어!’하고 당당했거든요. 개구쟁이였죠(웃음).”

어디 어린 날의 스님을 지킨 것이 대지의 힘이기만 할까. 상노스님과 노스님, 은사스님과 주호 스님까지. 4대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스님은 우주의 손길을 받아들이듯 쑥쑥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은사스님의 정성 가득한 ‘밥’. 모든 계절의 정수만을 골라 담아낸 것만 같았던 그 밥상이 있다. 

“제 은사스님이신 성우 스님(김천 대휴사)은 음식솜씨가 타고난 분이세요. 봄이면 꼭 봄에 맞는 음식을 해주셨지요. 살아 있는 것은 제철을 지키며 먹고 살아야 한다고요. 덕분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음식을 접하며 컸어요. 제가 자라면서 먹은 음식 얘기라면 밤을 새워서도 할 수 있을 걸요(웃음).”

덕분에 주호 스님의 계절은 세상 그 무엇보다 다채롭다. 새싹이 피고, 여름의 햇살과 가을 곡식이 여무는 때, 함박눈이 내리는 어느 날까지. 함께 나눈 음식은 모두 추억이 되어 모든 계절을 밝힌다.

봄의 전령, 쑥

“이제 막 쑥이 한창일 때예요. 당연히 쑥칼국수 먹어야죠!”

주호 스님에게 봄의 국수를 꼽자면 단연 쑥칼국수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땅의 기원 설화에도 등장하는 원시적인 생명력과 인내의 상징. 우리네 산야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쑥은 그 어떤 꽃봉오리보다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이 계절의 전령사다. 

“어릴 적에 스님이 쑥 뜯어와라, 하시면 밭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힘들어서 도망가고. 또 냉이 뜯어와라, 하시면 냉이랑 풀도 구분하지 못해서 이름 모를 풀만 한 소쿠리 뜯어왔던 기억이 나요(웃음).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보고, 배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쑥칼국수는 아직 보드라운 쑥잎만을 갈아 즙을 내고, 다시 밀가루에 그 즙을 척척 발라가며 반죽을 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묘미는 그 은은한 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런 이유로 채수 또한 진하지 않게, 은근하고 슴슴하게 끓여내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완성된 쑥칼국수 한 상! 눈을 즐겁게 하는 짙은 녹색의 면발, 입에 들어간 순간 쫄깃한 식감과 입안 가득 퍼지는 은은한 쑥 향이 어우러져 춤을 춘다. 

“봄이면 쑥옹심이, 쑥떡, 쌀가루 묻혀 쪄 먹는 쑥털털이, 또 새순만 뜯어서 새콤달콤하게 무쳐 먹기도 하지요. 봄에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정말 선물 같아요. 아주 호사스러운 선물이요.” 과연 이 맛과 향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명불허전, 이 봄의 가장 귀하고 귀한 선물이다.

자유와 전통 

“제가 자란 절을 처음으로 떠난 건 청암사 승가대학에 입학했을 때예요. 그게 첫 둥지를 떠난 경험이었죠. 봄에는 진달래꽃, 겨울에 펑펑 내리던 눈이 참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좋은 계절이면 늘 그곳이 그립습니다.” 

따스한 봄날, 학인 시절 수업이 끝나면 도반들과 함께 후원에서 남은 밥과 반찬을 얻어 밭으로, 계곡으로 나섰다. 지천에 널린 돌나물과 상추를 뜯어 다 함께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또 홀로 산과 들을 다니며 오미자와 다래 순, 민들레, 쑥, 씀바귀, 화살나무잎…. 봄에 나는 모든 새순을 모아 차를 만들었다. 보라색 덩굴 꽃과 산천의 진달래를 그냥 보낼 수 없어 청암지(청암사 승가대학 계간지) 편집실에서 카메라를 빌려 그 모습을 담기도 했다. 잠이 부족해 졸음이 쏟아지고, 배움은 어려웠어도 몸과 마음에 기운이 절로 충만한 시절이었다.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어른스님들께서 이제 더 넓은 세상을 봐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 강원도 설악부터 저 남해 땅끝마을까지 방방곡곡을 여행하게 해주셨어요. 뭐든 안 된다는 말씀보다 해봐라, 할 수 있다 하며 응원해주신 덕분에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사찰음식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도 제게 많은 것을 알려주신 은사스님 덕이에요.” 
이제 주호 스님은 어린 시절 먹고 자란 은사 스님의 제철 음식, 우리네 산사의 전통 음식들을 또 다른 세대와 이웃들에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른스님들에게서 제자로, 어머니에게서 자녀에게로 전해지던 옛 음식들의 나날이 귀하게 느껴지는 탓이다.

기록하고 나누며 지켜낼 존재

 

“이제는 과거로 묻힐 수 있는 그런 음식들을 자꾸 찾아내려 노력합니다. 늘 먹던 음식이라도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희미해지거든요. 그럴 때마다 은사스님께 전화해서 방법을 여쭤보곤 해요. 가끔은 어른들 곁에서 좀 더 머물며 더 많이 배워둘 걸, 하는 생각에 아쉽기도 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벽을 허무는데 함께 만든 음식을 나누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어디 있을까. 도량을 찾는 불자들과 이웃 종교인, 시민들과 학생들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강연을 청하는 곳이 있으면 거리를 불문하고 달려가는 이유다. 은사스님께 전해 받은 오랜 기억의 맛에 불가의 정신을 더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 지금 가장 잘 할 수 있는 포교의 방편임을 믿고 매일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음식을 먹으면 그와 관련된 시간이 되살아나지요. 음식은 나를 만들어주고, 성장하게 하고, 또 다른 존재들과 소통과 공유를 돕는 좋은 매개체입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더 열심히 기록하고, 지켜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제는 아스라이 사라진 어떤 풍경들, 하지만 여전히 그 추억을 소환하는 마법은 존재한다. 만약 그 무엇으로도 몸과 마음의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면, 이 계절이 선물하는 가장 귀한 선물을 만나보라. 대지의 기운이 오롯이 담긴 봄날의 밥상, 그 호사한 찰나를.

▶한줄 요약 

쑥칼국수는 아직 보드라운 쑥잎만을 갈아 즙을 내고, 다시 밀가루에 그 즙을 척척 발라가며 반죽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묘미는 그 은은한 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런 이유로 채수 또한 진하지 않게, 은은하고 슴슴하게 끓여내야 한다.

주호 스님의 쑥칼국수 만들기

재료
중력분 2컵, 밀가루 100g, 애호박 한 개, 당근 반개, 감자 1개, 표고버섯 5개, 다시마 한 장, 간장 2T, 소금+콩기름 약간.

만드는 법
1. 생쑥을 잘 다듬은 뒤 깨끗하게 씻어 물 2컵을 붓고 믹서기에 갈아 면보에 걸러 즙을 짠다. 
2. 밀가루에 쑥즙을 넣고 소금을 약간 넣은 뒤 치대어 반죽을 한다. 이때 콩기름을 약간 넣어주면 더욱 쫄깃해진다.
3. 솥에 표고와 다시마, 감자를 넣고 끓인다. 표고버섯과 다시마는 건져내어 곱게 채를 썬다.
4. 애호박과 당근을 채를 쳐서 준비한다. 
5. 반죽을 밀대로 얇게 밀어서 돌돌 말아 채를 썬다.
6. 준비된 채수가 끓으면 국수를 넣고 애호박, 당근, 표고를 넣어 간장으로 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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