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목숨 다할 때까지 부처님 법 전하겠다”

설악산 백담사 무문관서 정진 마쳐
안거기간 ‘본래면목 무엇인가’ 참구
하루 한끼 먹으며 정진, 6kg 빠져
“불보살 가피로 여법하게 정진 회향”

은사 해안 스님 가르침 항상 새겨
스승 법문, 녹음기 짊어지고 녹취
해안 스님이 보인 전법 원력 계승

동명 스님은… 195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1964년 부안 내소사에서 해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내소사에서 사미계를,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하고 1975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이후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부안 내소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서울 개운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전등사 회주이자 조계종 원로의원으로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동명 스님은… 195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1964년 부안 내소사에서 해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내소사에서 사미계를,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하고 1975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이후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부안 내소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서울 개운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전등사 회주이자 조계종 원로의원으로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서울 성북의 강소(强小)사찰 전등사가 아침부터 분주하다. 약 넉 달 만에 열리는 법회에 불자들은 법당과 공양간 등에서 분주하게 손을 보태고 마음을 모았다. 동안거 시작 이후 기도법사스님과 동지, 정초기도 등 예정했던 정진을 빠뜨리지 않았지만 불자들에게 이날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바로 전등사 회주이자 조계종 원로의원 원산 동명 스님을 친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설악산 백담사 무문관(無門關)에서의 정진을 마치고 법상에 오른 동명 스님은 전과 다름없는 천진난만한 미소로 불자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췄다. 

“사방이 막힌 독방에서 ‘폐문정진(閉門精進)’해야 하는 무문관의 창 너머로 보이는 설악산의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근원,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일까를 참구했습니다. 저 물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갈까? 저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갈까? 사람의 마음은 어디서 생겨서 어디로 갈까?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생명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공부를 여기 계신 우리 불자님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도 가득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다른 공간이었지만 서로 여법하게 수행하고 다시 만나게 돼 너무 반갑습니다.”

법회에 이어 계속된 기도에서도 스님은 불자들을 위한 축원을 쉬지 않았다. 50여 명의 불자들은 부처님 전에 머리를 숙였고 지극정성으로 마음을 살펴주는 동명 스님에게 다시 한번 두 손을 모았다. 

무문관 수행, 마음 젊어진 시간 
법회와 기도가 끝나고 전등사 공양간을 찾았다. 불자들과 ‘겸상’을 하는 동명 스님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종단의 원로의원이고 대중들의 존경을 받는 어른이라면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공양을 받을 수 있겠지만, 공양간 한복판에서 대중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모습은 스님의 평소 모습과도 잘 어울렸다. 

공양을 마치고 스님과 마주 앉았다. 손수 준비해주신 믹스 커피 한 잔이 어느 차보다 달콤했다. 맑고 밝은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무문관에서의 고행을 말해주듯 확실히 스님은 야윈 모습이었다.

“무문관에 들어가기 전 설악산 봉정암과 오세암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무문관 수행을 잘 회향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저의 은사이신 해안 큰스님도 그렇고 저도 만해 스님을 특별히 존경하기 때문에 이번 설악산에서의 기도와 정진은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시인이나 문학가로 만해 스님을 알고 있지만 사실 스님은 선지(禪旨)가 대단했습니다. 확실한 선사(禪師)였어요. 그리고 해방을 향한 스님의 의지도 확고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변절을 할 때도 스님은 끝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수행자의 기백이 살아 있던 어른이었습니다.”

약 한 달간의 담금질 뒤 스님은 무문관에 입방했다. 스님 포함 총 11명의 납자(衲子)들이 방부를 들였다. 

“무문관에서의 24시간은 온전한 나만의 시간입니다. 잘 활용하면 48시간도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하면 24시간이 1시간, 2시간도 안 되게 살 수 있습니다.”

스님은 “매우 알찬”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무문관에 살아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심자보다는 공부가 좀 된 사람이 와야 한다는 생각을 우선했습니다. 자기 공부가 무르익어가는 수행자가 온전하게 자기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만 안 된 사람은 큰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행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원력이 없으면 버티기 어려운 곳이 바로 무문관입니다.”

스님은 매일 오전 10시 30분 식구통(食口桶)을 통해 공양을 받았다.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공양을 두 번에 나눠 먹었지만 사실상 금식에 가까운 식사량으로 육체적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 치통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소금으로 하루 여섯 번의 양치를 하면서 고통을 이겨냈다. 살이 빠지는 것도 느껴졌다. 해제하고 저울에 올라보니 6kg이나 빠져 있었다. 

“거울을 보면서 이제 저도 할아버지가 다 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 70대 중반의 나이이니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죠. 그래도 마음은 더 젊어진 시간이었습니다. 들어갈 때는 11명이었는데 해제할 때 보니 3명이 보이지 않았어요. 갑작스럽게 병이 와 도중에 퇴방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불보살님의 가피로 겨울 정진을 원만하게 회향한 것 같습니다.”

무문관 수행에 대한 말씀 도중 여러 차례 등장한 선지식이 있다. 바로 해안 스님이다. 스님은 “무문관에서도 해안 큰스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또 새겼다”고 했다. 동명 스님은 경봉 스님을 모시던 명정 스님, 구산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현호 스님,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원택 스님과 함께 ‘현대불교 4대 효상좌’로 꼽힐 정도로 스승에 대한 마음이 지극하다. 

“무한한 가치 담긴 전법, 불자라면 실천을”

지난해 상월결사 인도순례 동참해
43일 1167km, 걸으며 성지 순례
회향하며 “더 열심히 살자” 다짐
‘부처님 법 전합시다’ 동참 강조 

동명 스님은 상월결사 인도성지순례단과 함께 43일간 걷고 또 걸었다.
동명 스님은 상월결사 인도성지순례단과 함께 43일간 걷고 또 걸었다.

그 스승의 그 제자
근현대불교에서 ‘동(東) 경봉, 서(西) 해안’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대중의 존경을 받았던 수행자 해안 스님. 해안 스님의 제자가 바로 동명 스님이다. 

전등사는 해안 스님이 1972년 서울 수유리에 ‘전등선림’을 연 것이 그 시초가 됐고 1977년 해안 스님의 맏상좌 혜산 스님이 현 전등사 위치로 이전 개원했다. 동명 스님이 1996년 지금의 전등사 건립 불사를 마무리하면서 그 가풍이 이어져 오고 있다. 동명 스님이 스승과의 인연을 풀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집이 무척 어려웠어요. 어느 날 어머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마을 위에 있던 암자로 데리고 가셨어요. 거기 계신 스님에게 ‘제 자식을 좀 맡아달라’고 하셨습니다. 절에 있어 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온갖 일을 해야 해서 힘들기도 했지만 절 생활이 괜찮았습니다. 2년여를 그렇게 보내던 어느 날 어떤 노보살님이 저를 보시고는 ‘여기 있으면 일만 하니 좋은 스승을 찾아가라’며 저를 해안 큰스님께 소개해 주셨어요. 전주에서 큰스님을 만나기로 했는데 제가 하루 늦게 도착해 뵙지를 못했습니다. 예산 보덕사로 가셨다는 말에 다시 발걸음을 돌려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보덕사에 도착한 동명 스님은 해안 스님의 말씀에 따라 하루 1만배씩 열흘 동안 10만배를 했다. 동명 스님의 근기를 확인한 해안 스님은 어린 상좌가 청소와 울력은 물론 염불과 경전 공부 등을 충실히 이행하도록 당부했다. 해안 스님의 원래 주석처였던 부안 내소사 지장암으로 가서도 공부는 멈추지 않았다. 

“하루는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큰스님께서 오셔서 주장자로 우물을 세 번 두드리며 ‘이게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더니 큰스님께서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으라’는 화두를 내려 주셨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사랑은 많이 받지 못한 편인데 큰스님께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경전을 보다가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여쭸고 큰스님께서는 자상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또 제가 글을 짓는 것에서부터 언행(言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어요.” 

동명 스님은 내소사에서 행자 생활을 마치고 계(戒)를 받은 뒤 해인강원을 졸업하고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등 제방선원에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화두로 참구했다. 이후에는 동국대 불교대학원을 졸업하고 부안 내소사 주지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서울 개운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강원을 마치고는 여주 근처 토굴에서 3년간 생식과 묵언으로 결사(結社)와 같은 수행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의 공부가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해안 스님은 수행에도 철저했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요청하는 법문은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수락했다. 이럴 때면 동명 스님을 비롯한 제자들은 큰 녹음기를 짊어지고 스승을 시봉했다. 

“큰스님의 법문을 기록하기 위해서 녹음기를 부처님처럼 모시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타고 가던 버스에서 갑자기 불이 났습니다. 다들 황급히 몸을 피하는데, 저는 혜산 스님과 녹음기를 ‘사수’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하하.”

이런 제자들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지금도 해안 스님의 법문은 생생하게 대중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큰스님께서는 평생을 부처님 법에 의지해 사셨습니다. 또 참선을 하고 법문을 하고 신도들을 만날 때에도 한결같은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질서정연하고 편안하며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삶을 사셨지요. 큰스님께서는 또 그렇게 검소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세숫물을 떠다 드리면 그걸로 세수하고 발 닦고 걸레 빨고 난초에 물을 주고 마당에 뿌리셨습니다. 그리 많은 양도 아니었는데 언제나 그렇게 사셨어요.”

동명 스님은 특히 해안 스님의 전법(傳法) 의지를 강조했다. 법을 전하기 위해 해안 스님이 전등사를 창건했다고 했다. 

“큰스님께서는 불법(佛法)을 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원력을 실천하셨습니다. 전등회(傳燈會)를 만들어 고군분투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생각해 보니 전등사에 들어올 때 입구에 서 있던 ‘전등사 연혁’ 비(碑)에도 전등회가 시작된 이유가 적혀 있었다.

“부처님께서 밝혀주신 진리의 등불을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사들이 서로 전해 수많은 중생들이 무명을 밝히고 안락의 세계로 들어서게 했다….”

쿠시나가르 열반당에서 예를 올리고 있는 동명 스님과 순례단원들
쿠시나가르 열반당에서 예를 올리고 있는 동명 스님과 순례단원들

“진리를 전하는 것은 願力” 
동명 스님의 전법 의지는 해안 스님과 닮아 있다. 스님이 지난해 인도의 부처님 성지를 순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전법에 대해 여쭈려 하니 스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메모한 글씨를 보여준다. 

메모의 내용을 살피니 ‘상월결사 인도순례 전도선언문’이었다. ‘중도를 배우고, 팔정도를 실천하며, 겸손을 미덕으로 인류의 행복을 위해 법을 펼치기 위한 길을 떠나라’라는 선언문은 상월결사 순례단에게는 정언명령과도 같았다. 

동명 스님이 써내려 간 한 글자 한 글자에는 정성이 가득했다. 간절함이 글자 하나하나에 박혀 있었다. 

“부처님의 전도대선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간절하게 당부하셨던 그 말씀을 지금의 언어로 풀어낸 것입니다. 언제 보아도 가슴에 새겨야 할 글이라고 생각해 사경하는 마음으로 적어보았습니다.”

스님은 지난해 2~3월의 43일 동안 1167km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에 동참했다. 부처님의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순례 후 스님은 수행과 전법이 불법(佛法)의 두 바퀴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인도의 열악한 환경과 익숙하지 않은 날씨에 건강 걱정까지 겹쳐 처음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인도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죽음을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서 순례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전등사 대중들을 모아 놓고 그동안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제 모든 것을 맡기고 순례를 떠났습니다.”

온갖 난관이 ‘현실’로 다가왔지만 대중들을 믿고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2시부터 매일 20~30km를 걷고 또 걸었다. 

“대중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대중 전체의 순례가 엉망이 됩니다. 대소변이 통제가 안 돼 법복 하의가 다 젖어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걷다 보면 다 말라 있어요. 그렇게 참고 견디며 제 자리를 지켰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도의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또 걸으면서 부처님의 발걸음을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의 생애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성지에 갈 때마다 부처님께서 저에게 직접 감로수와 같은 법을 전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하루가 환희심으로 가득한 날이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서 출가해 깨달음을 얻고 법을 전한 뒤 열반에 들었던 성지 곳곳을 살피고 살폈다. 부처님 생애를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의 게으름을 참회하는 눈물이자 더욱더 정진에 진력할 것을 다짐하는 눈물이었다. 

부처님처럼 길에서 일어나 길에서 먹고 길에서 잠을 청했다. 걸음을 멈춘 뒤에는 방일하지 않고 108배 기도를 올리고 <금강경>을 독송하며 정진했다. 

순례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깨달음의 성지 보드가야에서였다. 상월결사 회주 자승 스님의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우리가 안일하고 방일할 때 한국불교도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늘 포교만이 한국불교의 살길이며 포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이곳에 오신 분들이 걷고 있는 마음 마음 속의 느낌이 진실하고 간절하면 한국불교 중흥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스님은 인도순례를 마치고 더 절실하게 수행을 생각했다고 한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먹물 옷을 입고 있는 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우리 불자들과 함께 정진해야겠다고, 또 더 널리 법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할 수 없는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원력(願力)입니다. 누가 법을 전하고 받겠습니까? 법이라는 것은 원래 자증자오(自證自悟)입니다. 법을 전하는 것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매우 귀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사부대중 모두가 법을 전하고 또 전합시다.”

천진하던 스님의 얼굴에 ‘결기’가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은 말한다. “동명 스님이야말로 가장 스님다운 스님이다. 자다가 봐도 천상 스님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동명 스님의 원력은 변하지 않았다. 전법의 등불을 계속 밝혀나갈(傳燈) 동명 스님의 향후 행보에 대중들이 기대를 숨기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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