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유억불 풍파 이겨낸 신라 관음보살상 

용장곡 석조여래상 왼편 계단 오르면
1천년 넘게 삼릉곡 지킨 보살상 만나 
양반들 묘지 조성하며 불상들 파괴해
고난 이겨낸 신라 관음상 ‘위풍당당’ 

경주 남산 삼릉곡 마애관음보살입상. 정병을 든 형상은 8세기 관음보살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경주 남산 삼릉곡 마애관음보살입상. 정병을 든 형상은 8세기 관음보살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용장곡 석조여래좌상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계단이 보인다. 이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 것 같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 글을 보고 아쉬움에 잠 못 들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계단을 오르면 바로 1000년을 넘게 삼릉계곡을 지키고 계신 관세음보살님이 서 계시기 때문이다. 일명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입상이다. 무엇보다 조선 500년 숭유억불의 풍파를 이겨내고 당당하게 서 계신 늠름한 향기가 풍기는 보살상이다.

조선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던 주자학을 근본으로 해 1392년 건국된 국가다. 조선에서 불교는 탄압받고 파괴되는 모습을 당연한 수순처럼 밟는다. 조선 초 1406년 음력 6월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은 전국의 모든 사찰을 오교양종(五敎兩宗)으로 통합시키고 242개의 사찰만 공식 인정한다. 불교의 여러 종파를 교종 5개 선종 2개로 통폐합시킨 것이다. 

이후 20여 년도 안 된 1424년 음력 4월 세종은 오교양종을 교종 18개 사찰로 통합하고 선종 18개 사찰로 통합한다. 즉 불교 종파를 교종과 선종으로 통합시킨 것이며 242개 사찰에서 36개 사찰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초기부터 불교를 억압하기 위한 이러한 정책으로 그동안 발전돼왔던 불교의 다양한 전통과 수행체계는 무너지고 사라진다. 이러한 불교 억압은 유학자들에게 불교 탄압 즉 도심과 교통 요충지에 있던 사찰 파괴의 불씨를 당길 힘을 준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국사로 임명된 무학이 기거하며 중창한 양주 회암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회암사는 창건의 기원에 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색이 쓴 <회암사수조기>를 보면 1376년에 나옹화상이 회암사를 중창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조선 초기 회암사에서의 일화가 많이 나온다. 태조 2년 1393년을 시작으로 왕이 된 이성계는 회암사를 자주 방문하고 있다. 특히나 태상왕이던 태종 2년 1402년에는 회암사에 궁실(宮室)을 짓고 사찰을 중창한다. 또한 무학의 부도를 미리 만들라고 명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태조와 연관이 있는 회암사를 명종 21년 1566년에는 유림들이 불태우려 하는 것을 진정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이후 선조 28년 1595년이 되면 이미 회암사는 불에 타서 폐허가 됐으며 회암사의 범종을 녹여 무기로 만들고 있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중창된 회암사를 이름 없는 유림들이 불태울 정도로 조선에서 불교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조선의 억불정책은 사찰의 파괴뿐 아니라 자생력으로 살아남기 힘든 환경을 조성한다. 조선 초기부터 유림들은 지속해서 여성들의 사찰 방문을 비난하고 있으며, 그런 가운데 세종은 1434년을 기점으로 여성의 사찰 출입을 금지한다. 

이러한 숭유억불의 상황 속에서 조선의 사찰들 80% 가까이 파괴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이다. 전쟁 기간 조선 승군 활동의 보복으로 일본군은 지나가는 곳에 있는 모든 사찰을 파괴한다. 이러한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많은 사찰들이 폐허로 남게 된다. 이후 160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중창 불사가 일어나지만 경주 남산의 사찰들은 다시는 재건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기가 되면 풍수지리의 유행으로 폐사된 사찰 터는 명당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순조실록> 1821년의 기사를 보면 경기도 광주의 한 유학자가 자신의 아버지 산소를 쓰기 위해 회암사의 지공·나옹·무학의 부도를 파괴한 일이 나온다. 일반 사찰의 일이면 기록 없이 넘어갔을 일이지만 조선 태종이 명령해 만든 무학의 비석이기에 문제가 심각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조선 말기 유학자들이 조상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사찰 터에 있던 유적을 파괴하고 산소를 쓰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낱 경기 광주의 유생이 멀리 파주에 있던 회암사 터의 부도까지 파괴해가며 산소를 쓰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처벌을 논하는 자리에서 영의정과 좌의정은 가벼운 법을 주장한다. 그러나 순조는 태종이 정한 비문의 파괴는 국가의 권위의 문제이기에 엄한 처벌을 명령하면서도 혹여 모를 유학자들의 반발을 염려한다. 즉 불교를 위해 엄한 처벌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꿔 말해 국가의 귀중한 유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찰 터의 불교 유적을 허물고 무덤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공표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흥선대원군의 만행을 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만들기 위해 폐사시킨 예산군 가야사의 이야기는 웬만하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가야사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대규모 사찰이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보면 1844년 가야사를 파괴하고 남연군의 묘를 만드는 과정이 나온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의 금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쓰는 내용이다.

경주 남산의 불탑과 불상 또한 조선 말기에 접어들어 사찰에 조상의 묘를 쓰면 좋다는 이야기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거의 모두 파괴된 것이다. 남산의 폐사된 사찰 터에 유학자들이 불탑과 불상을 파괴하고 조상의 묘를 쓴다고 한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경주 남산뿐 아니라 전국의 사찰 터 금당 자리나 불탑 자리에는 묫자리가 들어서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경주 남산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폐사된 남산의 사찰 터에는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의 사찰 순례를 다니면서 이상한 점을 본 적이 있는가 싶다. 일본에는 700~800년대 아니 그 이후에 조성된 크나큰 동으로 조성한 불상이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동으로 조성한 소형의 불상은 남아있지만, 대형의 불상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 또한 조선 말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1630년부터 1873년까지 보완해 편찬된 ‘속리산대법주사사적기’에 보면 속리산 법주사에는 신라시대 동으로 조성된 ‘미륵금동대불’이 있었다. 

사적기를 보면 진흥왕 15년인 서기 554년 법주사의 창건과 함께 장육상을 조성했다. 장육은 ‘1장6척’을 의미하는데 불상의 높이를 1척을 35cm로 보면 5.6m 높이에 달하는 금동불상이 된다. 진흥왕 대에 조성됐을까 싶은 의구심이 들지만, 신라시대 동으로 조성된 대형의 불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조선 말 흥선대원군에 의해 ‘미륵금동대불’은 몰수돼 사라진다. 신라의 동으로 조성된 유일한 대불이 1000년을 버티다 조선말에 사라진 것이다.

한국불교의 풍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서웠다. 이러한 풍파를 뚫고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입상은 당당하게 그 자리 그대로 서 있다. 높이는 154cm이고 바위의 윗부분을 깎아 들어가는 양각으로 돋을 새김했다. 얼굴과 함께 입상의 상체는 하체보다 입체감 있게 조각했다. 또한 바위 자체가 광배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왼손을 내려 정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의 흔적이 보이고 살짝 미소가 비치는 작은 입술에는 붉은 색감이 남아 맴돈다. 소녀가 서투른 화장법으로 입술만 붉게 칠한 듯 소박한 모습이다. 경주 남산에서 으뜸가는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왼손을 내려 손바닥을 보이며 정병을 든 형상은 8세기 관음보살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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