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라면 불살생·자비를 마음에 새겨야”

불살생, 생명 존엄성 자각하는 가르침
생명을 업신여기지 않고 귀하게 대해야
자비, 상대의 아픔 함께 아파하는 마음
타인 생명 소중히 여기는 곳이 ‘불국토’

2000년 간이식 수술 받고 제2의 삶 살아
이식 공여자 20대 청년은 나만의 선지식
‘선재영가’로 부르며 어디서든 왕생 발원
“내 안엔 수많은 기억들 함께 하고 있어”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春分)에 불암산 불암사(佛巖寺)를 찾았다. 

봄기운이 완연해서 불암사 경내의 수목(樹木)들에는 새싹이 돋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새싹은 자라서 꽃을 피울 것이다. 신록(新綠)이 돋아서 녹음(綠陰)이 우거지고, 단풍이 들어서 조락(凋落) 끝에 나목(裸木)이 되는 사계의 법칙을 관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해님의 얼굴(日面)이리라.  

약속 시간에 맞춰 종무소를 찾으니 두산 일면 대종사가 필자를 반겼다. 일면 스님은 자신의 주석처로 필자를 안내했다. 주석처 앞에서 왼쪽을 올려다보니 기암(奇巖)이 서 있다. 아마도 산 이름도, 사찰 이름도 ‘부처님 바위’를 기린 데서 연유한 듯싶었다.   

“새해 봄을 맞아서 불자들에게 희망을 덕담을 들려 달라”고 하자 일면 스님이 손으로 염주 알을 굴리면서 입을 뗐다.

“갑진년(甲辰年)은 청룡의 해이니만큼 불자 여러분의 가정에 용이 승천하는 기운이 깃들어 하시는 일마다 잘 되길 기원합니다. 복은 지은 업(業)을 받는 것이니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하길 바랍니다. 자무량심과 비무량심을 실천하려면 어떤 경우에도 성내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누리는 희무량심을 지니게 되고, 나아가서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사무량심을 지니게 됩니다. 욕심이 과할수록 행복은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일면 스님은 연기법을 알고, 남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깨우쳐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는 남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이치를 몸소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연기법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 사회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의 짐을 함께 짊어질 때 행복의 복도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증일아함경〉에 이르길, ‘베풂은 중생을 위한 복의 그릇이요,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이니, 누구라도 보시의 공덕을 생각하거든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내라. 베풂은 널리 평등하게 골고루 하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아야만 베푸는 마음속에서 나를 만나 구제받는 인연을 맺으리라’고 했습니다. 베풀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불보살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일면 스님은 〈불설죄복보은경〉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육바라밀 실천을 강조하기도 했다. 부유함은 보시의 공덕에서 비롯되고, 신체의 건강함은 지계의 공덕에서 비롯되고, 용모의 준수함은 인욕의 공덕에서 비롯되고, 노동의 근면함은 정진의 공덕에서 비롯되고, 언행의 청정함은 선정의 공덕에서 비롯되고, 사고의 영민함은 지혜의 공덕에서 비롯된다는 게 스님의 설명이다.  
일면 스님이 경어를 쓰는 이유
스님은 버릇인지 말하는 내내 경어를 썼다. “말씀을 편히 하시라”는 필자의 말에 스님은 출가인연에 대해 들려줬다. 

일면 스님은 1956년에 출가했다. 당시 사라호 태풍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태풍이 휩쓸고 간 뒤 마을 사람들은 무너진 토담을 보수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탁발승이 일면 스님의 속가를 방문했다. 탁발승은 일면 스님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 놈은 법기(法器)의 종자인 걸.”

일면 스님은 탁발승에게 맹랑하게 물었다. “법기의 종자라는 게 뭡니까?”

“중 될 놈이라는 말이다.”

그날 저녁 일면 스님은 탁발승의 뒤를 쫓아서 포항 정국사로 갔다. 탁발승은 정국사에 일면 스님을 데리고 간 뒤 다시 만행의 길을 떠났다. 정국사는 작은 인법당과 산신각뿐이어서 대중도 단출했다. 사찰에는 우물이 없어서 새벽마다 일면 스님은 물지게를 져야 했다. 사찰의 진입로는 경사가 급해서 곧잘 넘어져 무릎이 까지곤 했다. 나무 땔감을 해오는 것도, 때는 것도 모두 스님의 몫이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낸 뒤 스님은 경전 공부가 하고 싶었던 터라 강원이 있는 해인사를 찾았다. 어린 나이여서 해인사 사중 스님들은 일면 스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1주일 동안 사정을 한 끝에 일면 스님은 입산을 할 수 있었다. 

일면 스님은 어린 나이인데도 해인(海印)이라는 사찰 이름이 의미심장하게 여겨졌다. 썰물이 빠진 만큼 밀물이 다시 와서 채우는 바다. ‘출렁이다가도 잠잠해지는 바닷물에 어떻게 글자를 새길 것인가’하는 자신만의 화두가 생겼던 것이다. 

행자 시절, 일면 스님이 가장 흠모한 스님은 지월 스님이었다. 지월 스님은 소나기가 쏟아져도 뛰어다니지 않는 인욕보살이었다. 온화하고 인자한 성정의 지월 스님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했다. 일면 스님이 만나는 사람마다 경어를 쓰는 이유도 지월 스님에게서 배운 것이다. 

일면 스님의 은사는 조계종에서 엄하기로 유명한 명허 스님. 스님이 명허 스님을 자청해서 모신 까닭은 제대로 중노릇을 하고 싶어서였다. 명허 스님은 불암사로 출가해 풍곡 신원 화상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했으며, 금강산 마하연, 덕숭산 정혜사, 부산 범어사, 선암사, 해인사, 대흥사 선원에서 수행했다.

평생 화두 참구에만 몰두했던 명허 스님은 호랑이 같은 기상으로 후학에게 시주의 은혜를 소중하게 여길 것을 강조했다. 일면 스님은 장을 보러갔다가 사탕을 사먹은 것이 들통이 나서 은사스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참회의 삼천 배를 올려야 했다. 엄한 스님 밑에서 중노릇을 배운 까닭에 일면 스님은 하심(下心)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지난해 5월 열린 생명나눔 걷기명상 플로깅 대회에서 일면 대종사가 가수 이소원 양에게 홍보대사 위촉장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열린 생명나눔 걷기명상 플로깅 대회에서 일면 대종사가 가수 이소원 양에게 홍보대사 위촉장을 전달하고 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은사스님께서는 왜 스님에게 ‘일면(日面)’이라는 법명을 내려준 것일까요?”

필자의 질문에 스님은 손가락으로 해가 뜬 방향을 가리켰다.

“해(日)는 이 세상의 두두물물(頭頭物物)에게 이로운 빛을 주는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햇볕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너무 적으면 만물이 자라지 못하고 너무 많으면 만물을 태워버립니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지혜를 얻고 실천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운허 스님께서 내려주신 두산(斗山)이라는 법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흙을 한 말씩 떠서 옮겨 산을 쌓으라는 의미입니다. 봉선사와 조계종의 일꾼으로서 소임을 다하라는 당부가 깃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흙이 모여서 산을 이루고, 산들이 모여서 산맥을 이루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심원한 뜻도 깃들어 있는 것이지요.”

“조계종 원로의원으로서 종단 후학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해주십시오.”

필자의 말에 일면 스님은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는 〈법성게〉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냈을 때가 바로 정각(正覺)을 이룬 때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진여(眞如)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바로 나타납니다. 처음 발심할 때의 마음만 퇴전하지 않고 정진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원력을 세우지 않으면 중노릇은 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자라면 마땅히 강건한 신념을 지녀야 합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정신을 지녀야 하는 것은 참선 수행자만이 아닙니다. 전법포교 현장에 있는 스님들도, 사회복지 현장에 있는 스님들도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종단의 후학들은 항상 ‘내가 왜 출가했는가’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중생 구제, 수행자가 공히 지닐 원력”

종단 원로의원으로 후학에게 하는 당부
‘나는 왜 출가했나’ 마음을 항시 지녀야
불자들에겐 “함께 살아가는 지혜 가져라”


스님만의 선지식 선재영가
말을 마친 뒤 스님은 상반신 전체를 가로지르는 십자 모양의 수술자국을 보여줬다. 이어서 자신이 간이식 수술을 받은 경험담을 들려줬다. 

2000년 1월 8일, 일면 스님은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스님이 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은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1982년. 일본어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병원 의사는 “지속적으로 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스님은 조계사 재무 소임을 맡고 있었던 터라 의사의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993년 간경화 진단을 받은 뒤에야 치료를 시작했지만 이미 건강은 회복이 불가능하게 악화돼 있었다. 그러던 중 일타 스님의 열반다비식에 다녀오는 길에 심한 복통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하였다. 

당시 스님의 AST 지수는 8400. 정상인의 경우 AST지수가 20~30인 것을 감안하면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심신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스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경전을 읽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스님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뇌사 장기기증자가 나타났다. 당시 간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많았다. 앞 차례에 있는 네 사람 모두 장기기증자의 간을 이식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스님이 수술대에 오를 수 있었다. 낮에 수술실에 들어간 스님은 새벽이 되어서야 중환자실로 옮겨질 수 있었다. 

병실에 옮겨진 뒤 스님은 염불소리를 들었다. 스님은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서 온몸에 퍼지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염불을 따라서 외웠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병원 간호사들은 염불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간이식수술로 제2의 삶을 살게 된 후부터 스님은 종종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화두를 떠올리곤 했다. 그날 저녁 스님이 읊었던 염불은 어쩌면 스님에게 간을 보시하고 떠난 영가에게 바친 송가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님이 지남(指南)으로 여기는 선지식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필자의 질문에 스님은 환한 미소를 지은 뒤 대답했다.

“지월, 명허, 운허 스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왔습니다. 제게는 저만의 선지식이 있습니다. 바로 선재(善財)입니다. 제게 간을 주고 간 사람은 22세의 강원도 청년이었습니다. 규정상 그 사람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의 이름을 선재 영가라고 부릅니다. 어느 절을 가든지 저는 청년의 극락왕생을 발원합니다. ‘선재, 선재영가여, 착하디착한 영가여, 부디 극락왕생하소서’라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저는 법장 스님이 육신마저 보시하고 적멸의 세계에 든 뒤부터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소임을 보면서 간절히 느끼는 것은 삶은 사계처럼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선재영가의 신체 일부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가슴 속에는 수많은 인연들의 기억들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9월 육군훈련소 호국연무사 큰법당에서 열린 수계법회에서 일면 대종사가 장병에게 연비를 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육군훈련소 호국연무사 큰법당에서 열린 수계법회에서 일면 대종사가 장병에게 연비를 하고 있다. 

세상에 무엇을 물려주고 갈 건가
차를 한 모금 마신 일면 스님은 자비의 가르침을 새길 것을 강조하며 법문을 이어갔다. 

“부처님은 전생에 새끼 밴 어미 사슴을 위해서 자진해서 처형대에 오르는 니그로다 사슴이었습니다. 불자들은 더운 숨을 삼키는 마지막 순간에 이 세상에 무엇을 물려주고 갈 것인지를 항상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불자라면 그 무엇보다도 불살생(不殺生)과 자비(慈悲)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불살생은 생명의 존엄성을 자각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자연이 하나의 공동체라고 인식한다면 다른 생명체를 업신여기지 않고 존귀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자비란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상대방의 슬픔을 더불어 서러워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타인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안다면 절로 불국토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필자는 불암사 경내에 걸린 가지각색의 연등들을 올려다봤다. 지증 대사가 창건했고, 도선 국사가 중창했으며, 무학 대사가 삼창했다는 불암사에는 인조 16년(1638) 왕명에 따라 역대 스님들의 법통을 판각한 보물 제591호 석씨원류응화사적책판(釋氏源流應化事蹟冊板)이 봉안돼 있다. 창건 이래 천년 동안 불암사에는 민초들의 염원이 깃든 연등이 환히 불을 밝혔을 것이다. 

필자는 시선을 돌려서 불암산을 올려다봤다. 고찰치고 민족의 역사가 깃들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마는 불암사는 실로 민족의 숨결이 깃든 도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필자의 속내를 꿰뚫은 듯 일면 스님은 “불암사는 매년 호국의 달에 불암사 유격대를 기리는 천도재를 봉행한다”고 말했다. 불암산 유격대는 한국전쟁 개전 직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지 않고 불암산에 은신하면서 싸운 육사생도 13명과 기간병 7명을 일컫는다. 불암산 유격대가 전쟁 초 수개월간 적진 가운데서 살아남아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불암사 사중스님들의 덕분이기도 했다.

일면 스님은 산문까지 따라나서며 필자를 배웅했다. 사하촌에 다다르니 일면 스님이 지은 〈나와 당신에게 꼭 필요한 법문〉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법화사상에 ‘한쪽 모퉁이를 비추면 천지가 밝아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곳에서 밝은 일이 생기면 그 일로 전체가 다 밝아질 수 있다는 뜻으로 우리 삶과 사회에 지침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한쪽 모퉁이를 비출 빛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빈손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손에 더 많은 것을 움켜 쥐려고는 해도 한 손을 비우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 손쯤 남을 위해 비워두어도 됩니다.”

필자는 불암사를 뒤돌아본 뒤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미당 서정주의 ‘푸르른 날’의 한 구절을 읊조렸다. 

두산 일면 대종사는…
1959년 해인사에서 명허(明虛)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입산했으며, 1964년 사미계를, 1967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8년 해인사승가대학 대교과 졸업, 1979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 졸업, 2010년 태국 캘리포니아 탐마까야 불교대학교 불교학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운허(耘虛) 스님에게 입실 건당해 두산(斗山)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1983년 수락산 흥국사 주지, 1996년 불암산 불암사 주지, 2001년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봉선사 주지, 2005년 대한불교조계종 군종특별교구 초대교구장 등을 역임했다. 9·10·11·12·13대 중앙종회 5선 의원을 지내며 중앙종회 사무처장과 수석부의장을 맡아 활발한 입법 활동을 했으며, 조계종 포교부장, 사회부장, 원로회의 사무처장을 거쳐 교육원장을 역임하면 도제 양성 교육의 기틀을 다졌고, 호계원장을 역임하면서 종단 사정기관의 기강을 확고히 했다.

광동학원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경기 북부를 대표하는 명문 사학으로 육성 발전시켰으며, 동국대학교 38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교육 불사에 진력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간 이식수술’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은 후 스님은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을 맡아서 장기기증, 조혈모세포 모집, 환자 치료비 지원, 자살예방센터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생명나눔 문화 확산에 기여해 왔다.

스님은 사회활동 경력을 인정받아 대한적십자 박애장 금장, 대원상 대상, 대한불교조계종 제22회 포교대상 공로상, 한국을 빛낸 사람들 대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원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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