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딸이 하루는 저녁을 먹으며 친구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 “PTG 오겠다”는 말을 했다. 자부심도 잠시, ‘PTSD’를 말하려다 틀린 모습이라 스스로도 민망한지 다시 고쳐 여러 번을 반복해 발음하려 노력하는데 점점 혀가 꼬여 엉망이 되는 모습이다. 유식하게 말해보려다 망신을 당했으니 부끄럽기도 했을 것이고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기도 힘들었을 터. 동생의 얼굴이 빨갛게 변한 모습을 보고 있던 첫째 딸이 한쪽 입술을 올리고 쳐다보며 비웃듯 말했다.“PTSD!”“정확하게 모르면 사용을 하지 말라”는 핀잔도 덧붙이는 첫째였다. 둘째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열린 ‘감정수업’ 현장.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가까워지자 서로의 MBTI를 궁금해했다. 고학년들은 어느 정도 MBTI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자신과 잘 맞는 성격유형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에 대해 숨기기도 하면서 얼무적거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냥 신기하고 궁금했던 저학년들은 저돌적으로 질문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 핸드폰을 열어놓고서 이리저리 대답을 하다가 마침내 나온 결과에 당황스러워했다.“내가 그렇다고? 나는 그런 성격 아니야!”아이들은 인정하기 싫은 듯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여자아이 한 명
감정마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이 셔터를 내리듯 차단되는 상황이다. 감정마비 상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어릴 때부터 학대를 당했거나 왕따 경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등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기도하다.특히 자식을 사고로 잃은 부모들의 경우 마음의 셔터를 더 강하게 내려버린다. 이런 경우 아버지들은 벼랑 끝으로 자신을 내몰아 스스로를 혹사시키며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도 한다. 그들은 아프다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내담자 승희(45·가명) 씨는 쏟아 부은 상담의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분노 조절이 어려워 아이에게 던진 컵이 깨지면서 발바닥을 다쳐 절뚝거리며 상담실을 찾았다. “다쳤으니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내가 왜 이럴까요?”라는 말만 반복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상담 경험이 많지 않을 때 만난 내담자였기에 너무 난감하고 어렵게만 느껴져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녀는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했고 자신의 말만 옳다고 믿었다. 가족들은 가식적인 평화라도 지키려면 그녀의 말을 따르고 순종해야 했다.
지원(가명) 씨는 14년간 이어 온 남편의 병간호로 지쳐있었다. 평소 사람을 좋아해 친구를 사귀고 여행을 즐기던 지원 씨였지만 오랜 병간호로 더 이상 만날 친구도 없었고, 자신만을 찾는 남편의 고함소리에 외출은 쉽지 않았다. 요양병원에 보내라는 자식들의 권유를 들을 때면 화가 치밀고 남편과 함께 죽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상담실을 찾았다. 남편은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었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다행히 일찍 발견했지만 재발했고 병간호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낫는다는 희망마저도 이젠 사라졌다”며 눈물을 흘리던 지원 씨는 “그래도 그를 놓을
강력한 진통 효과로 알려져 있는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morphine)을 맞아도 효과가 없었다. 몸에는 이미 모르핀보다 강력한 펜타닐(fentanyl)이라는 마약성 진통제 주사를 연결하고 진통 패치도 붙여둔 상황이었다. 지난 1월 3일 극심한 다리 통증으로 앉고 서는 것이 불가능해 결국은 앰뷸런스를 타야 했다. 그동안 다리에서 느낀 방사통을 참으며 나름대로 관리를 했지만 단순한 디스크가 아닌 ‘척추전방전위증(척추분리증)’으로 수술은 불가피했고, 심하게 눌린 신경으로 인해 수술 후에도 통증이 사라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통증과
영화 ‘소원’을 보고나서 가슴 깊이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울적함으로 한동안 괴로웠다.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문득 영화 속 아이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외면하고 싶었다. 영화 ‘소원’은 9살 소녀가 학교를 가던 중 술에 취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트라우마를 겪는 아이의 심리적 치유와 건강을 위해 가족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수많은 트라우마 사건으로 평생을 괴롭게 사는 내담자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화 속 소원과는 달리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내가 하필 그
소원 씨(69·가명)는 지각이 잦은 편이었다. 지각을 하는 날이면 두통 때문에 병원을 다녀왔다며 힘없는 모습으로 상담실에 들어왔다. 소원 씨는 이른 아침 상담실로 출발했지만 “항상 이렇게 늦는다”며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고 울상을 짓곤 했다.상담실을 방문하면서도 소원 씨 자신은 상담 받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들에게 ‘문제없음’이란 소견을 받았지만 몸이 분명 아팠기에 계속 병원을 찾아다녔다. 병원을 1년 사이 200여 번을 갔고 새벽에 통증이 있으면 식구들이 급히 응급차를 불러야했다. 처음에 아프다고 울
한 수행자가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면서 “더 이상 청정한 수행이 즐겁지 않다. 약에 취한 듯 사방은 희미하게 보이고 나태와 무감각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고 괴로워했다. 부처님은 그에게 “탐욕과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몸은 불안정하다. 지금 너는 괴로움과 슬픔이 일어나느냐?”라고 묻는다.책 에 나오는 부처님의 사촌 팃사(Tissa)에 대한 에피소드다. 팃사는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며 무기력함과 나태함 속에서 괴로워했다. 부처님은 그를 찾아가 법을 설하며 “팃사야, 기운을 내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내가
우민(가명) 씨는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교로 복학하기 앞서 심각한 불안 증상을 호소하며 상담실을 찾았다. 그는 비죽하게 마른 몸에 얼굴은 광대뼈가 불거질 정도로 홀쭉하고 마른 인상이었다. 키는 180㎝가 훌쩍 넘어 보였고 외모에서 무언가 아슬아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소소한 질문을 할 때에도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답을 하다가 이내 말소리가 줄어들었고, 한참 침묵한 뒤 눈치를 살피듯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그는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항상 살피게 되고 무엇이 맞는지 몰라서 자신감이 없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 무엇이든 제대로 해내야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 1823~1860)는 철도 선로 쇳덩이가 얼굴을 관통하는 사고를 당했다. 끔찍한 이 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뇌과학과 정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됐다. 1848년 9월 13일, 게이지는 철도 확장 작업을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땅에 묻고 있었고, 갑자기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며 땅에 묻어둔 선로 쇳덩이가 날아가 왼쪽 뺨을 관통했다. 다행히 그리고 놀랍게도 게이지는 죽지 않았다. 뇌 좌반구에 큰 손상을 입었지만 게이지는 선로공사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고 목격자들은 게이지의 의식이 또렷했다고 증언했다.
한국인에게 할로윈은 슬픔의 축제가 됐다.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발생한 대형 사고로 159명의 안타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고 334명은 부상을 입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현장을 담은 사진을 보면 가슴이 내려앉는다.통계로 집계된 사망자 수는 159명이지만 그들과 관련된 가족과 친구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일순간 가족과 친구들은 ‘살아남은 자’가 되고 그들의 삶은 끝없이 이어질 상실의 과제를 감당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참사가 났던 그 순간에 멈춰있고 하루를 왜 살아야 하는지 물으며 견디고 있다. 이태원 참사
무더운 여름이었다. 상담실로 찾아온 영이 씨(가명)의 눈가는 땀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안되는 물기로 가득했고,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의자에 앉아있었다. 시원한 물을 담아 건네자 컵을 들고선 울기 시작했다. 영이 씨는 흐느끼며 “오늘은 죽어버리라고 소리를 질렀어요”라고 했다. 영이 씨가 “나가 죽어! 제발 나가죽어버려!”라는 모진 말을 쏟아낸 대상은 바로 영이 씨의 아버지였다.영이 씨의 아버지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회 (Alcoholics Anonymous, AA)에서 단주를 실천하고 있었다. 6개월 동안 단주하다 영이 씨가 상담실을 방
중학생 A는 마른 몸에 얼굴이 하얗고 눈이 큰 여학생이었다. 묻는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힘이 없는 목소리로 아주 짧게 말을 하고선 고개를 푹 숙였다.A가 상담을 위해 찾아온 이유는 커터(cutter)이기 때문이다. 가는 팔과 허벅지 그리고 손목에는 커터칼과 연필로 그은 상처가 있었고 흉터 위에 반복해서 그은 상흔은 꽤 짙었다. 처음 상담소를 찾았을 때 A의 엄마는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 했다. 큰 키에 다부진 모습의 엄마는 딸과는 대조적으로 목소리가 컸고, 진하게 그린 아이라인이 인상을 더욱 강해 보이게